유대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담기 꺼려서 "아도나이" 즉 
"나의 주"라 표현 했습니다  아도나이 또는 아돈이란 호칭을 사용하였
습니다.(헬라어로는 큐리오스) 그러므로 신약에서 야웨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엘(EL) 과 엘로아(ELOAH). 엘로힘(ELOHIM)
엘  샤다이(EL  SHADDAI)---- 전능하신 하나님
엘 엘리온 (EL  ELYON)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 EL OLam) ------------영존 하시는 하나님
 
많이 사용하는 엘로힘은 복수며(창세기 1장 1절) 남성형 단어다.
엘  엘로힘--->렐라어  Theos의  -- os 는 남성형 단어이다.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라 하셨다 페미니즘 신학자 하나님 어머니란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야웨 에로 해누 ----  야웨  우리 하나님.야웨 엘로힘---- 주 하나님
야웨 = 아도나이 =헬라어 큐리오스 = 나의 주
아도나이 야웨----- 나의 주 야웨
* 여호와 발음 Yahwh ---모세에 특별 사용한 고유명사(출애굽기3장15절)
------------ 끝  -------
 
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사도신경 강의1) 중에서 2019. 7.  2.
저자 강영안 (한국기독학생출판부발행)                金  鍾漢
 
 
 

골라당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니골라>라는 원어의 뜻이 "백성을 이긴다"라는 것을 들어 오늘날 <평신도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들>이라고 말한다.

이름 뜻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태도이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땐 원어의 뜻을 가지고 분석하는 것은 필수이지만, 인명이나 지명등 모든 것들을 다 그렇게 하는 것은 무리이다. 

일단 성경에는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전혀 이름과 상관없이 산 사람도 많이 있기때문이다.

예를들어 <위로>의 뜻을 가진 노아가 백성들을 위로하였는가?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찬양이란 뜻)가 이름처럼 살았는가?

사람들은 자기 자녀에게 좋은 이름을 붙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름대로 되던가?

"복"<복>자가 들어가는 사람이면 다 복을 받는가?

"아름다울" <미>자가 들어갔다고 다 아름답던가?

"지혜" <지>자가 들어갔다고해서 지혜롭던가?

그런 것들은 부모나 작명가의 희망사항일 뿐이지 그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사울은 자기를 바울(작은 자)로 칭했지만 이름처럼 작은 자가 되었는가? 바울처럼 큰 자도 드물것이다.

그러므로 <니콜라>의 뜻이 "백성을 이긴다"라해서 애매한 교회 목사들을 비난하는 용도로 사용하여 교인들 과 목사 사이를 이간하는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악한 일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니골라(또는 니골라당)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니골라를 알기 전에 먼저 발람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계시록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이 본문에서 보면 예수님은 발람의 죄를 언급하시고 나서 <이와같이(발람과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인가? 발람과 니골라는 동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니골라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먼저 발람을  알아야한다.

 

구약에 나오는 발람은 어떤 존재인가?

 

신약에서 발람을 언급한 사람 둘(베드로. 유다)이 있는데, 그들의 평가를 먼저 들어보기로 하자.

먼저 베드로는 발람의 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베드로 당시의 거짓선생들)이 바른 길을 떠나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벧전2:15)

 

또 유다는 이렇게 말하였다.

"화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유1:11)

베드로나 유다는 다같이 발람의 죄는 <삯(물질)을 사랑하고 따라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발람의 주된 죄는 <물질에 대한 탐욕>인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람에 대한 이야기는 민수기 22-25장까지에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마술사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모압왕 발락의 부탁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가 주겠다는 융숭한 대접과 풍부한 복채를 탐하여 발락왕에게로 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불의의 삯>을 사랑한자라고 베드로와 유다는 말하는 것이다. 

 

발람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엄청난 죄가 있다.

바로 이스라엘을 꾀어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게 한 죄이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2:15)

 

발람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오히려 입에서 축복의 말이 쏟아져 나오게 되자,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저주를 받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훗날 발락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음행을 겻들인 거대한 우상숭배 행사를 베풀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거기에 빠져들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도록 하는 일이었다. 얼마나 기발한 방법인가?

과연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렀을 때에 그렇게 한 결과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모압여인들의 유혹에 이끌려   우상숭배와 음행죄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나무에 매달려 죽게 되고,  그 여인들과 음행한 일반 백성들까지 찾아 죽이게 되었으니 그 숫자가 2만 4천명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발람의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발락에게 가르친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발람의 이야기에서는 우리가 결코 <백성위에 군림>하는 죄라는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발람은 왕이 되거나 높은 자리에 앉아 백성을 다스리거나 군림한 흔적이 전혀 없다.  그는 복채나 받아먹고 축복을 해 주거나 저주를 해주는 단순한 마술사나 점쟁이에 불과했고(민22:6), 백성들을 죄짓게 만들도록 악한 가르침을 제공한 교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을 백성위에 군림하는 성직자의 표상이라고 본다는 것은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이제 니골라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전에서 니골라당은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면 영지주의는 어떠한 이단인가? 파랄이라는 사람은 영지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파들이 있다고 말한다. 

1. 유대적인 영지주의: 에비온파, 케린투스파.

2. 수리아적인 영지주의: 발덴시아파

3. 금욕적인 영지주의: 바실리데스파

4. 음분적인 영지주의: 니골라당, 카포크라파

5. 허무주의 영지주의: 카인파, 오파이파

6. 문화적인 영지주의: 발렌티누스파.

7. 유대교와 기독교혼합적인 영지주의: 나사렛파

8. 반유대교적 영지주의: 마르시온파.  

 

여기 네번째 항목에 보면 니골라가 속해 있는 영지주의는 <음분적인 영지주의>라고 했는데, 일단 음분(淫奔)이란 무슨 뜻인가 살펴보면 한자상으로는 <음탕하고 분방한>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wantonlustfullewdlasciviouslooseslipperylickerish.으로써, 대개 음탕한, 탐욕적인, 호색적인, 무법대로의, 교활한, 선정적인, 등의 뜻이 있는 단어이다. 

 

비전성경은 <니골라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니골라라는 사람에 의해 생겨난 초대교회의 한 이단종파이며, 우상제물을 먹어도, 음행을 해도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빅컬러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의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의 하나로써 육체를 무시하고 영혼만 소중하게 여겼으며, 율법이 전혀 소용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는 자는 무슨 일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전하면서 다녔다."

 

톰슨2 성경주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자유를 남용하여 극도의 부도덕과 방종에 빠진 이단의 무리이다."

 

실제로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는 니골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니골라는 자기 아내를 여러 사람들 가운데 세우고 말하기를

 "누구든지 이 여자와 자고 싶으면 자라"

이것은 그만큼 그의 삶이 음탕하고 자유분방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결론>

 

이상으로써 니골라당의 정체에 대하여 주석들을 살펴보았듯이 니골라당 역시 일부에서 말하는 것 처럼,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들>이 아니라 <영지주의자들>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니골라가 "니카오(이기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 하여 무조건 <백성 위에 군림하는 성직자>제도라고 매도하고 있지만, 그건 근거없는 말이다.  

실상 니골라당이란 <예수님 믿고 영이 구원을 받았으니 육신으로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사상인 것이며, 오늘 날도 그런 주장들을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으려고해야지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며,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더이상 율법을 따라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자유를 얻었으니 다시는 율법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 까지는 바울의 논조를 따라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하자는 없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서 살라는 말은 쏙 빼놓은채,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구원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얼마든지 육체의 욕구를 따라서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자들, 정욕을 따라서 살아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자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야말로 지능적으로 말씀을 파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옛 죄속으로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발람이 아니고 무엇이며 니골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출처:http://cafe.daum.net/jordan2   글쓴이: 갈렙

 

“장차 올 세상”은 복음의 핵심이다

/ 로이드 존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히 2:5)

 

 

“이같이 큰 구원”의 목표가 무엇인가? 복음은 장차 올 놀라운 세상에 대해 알려 주는 메시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모든 복을 가리키되, 주로 장래 일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히 2:8). 만물이 그에게 복종할 세상이 장차 올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구원의 핵심에 있는 사실이다.

 

복음의 모든 유익 주에서도 가장 놀라운 유익들을 저 자신이 오랜 세월 놓쳤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가끔 두려운 마음이 든다. 구원을 주로 개인적인 체험 내지 주관적인 상태나 상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탓에 그렇게 놓치는 것이다. 복음은 개인적인 체험에 앞서 온 세상에 일어날 일을 알려 준다. 개인적인 측면을 다루기에 앞서 우주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원을 그렇게 좁게만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불행과 고통이 세상을 채우게 되었다. 질병과 죽음과 싸움과 불일치와 혼돈이 찾아왔다. 그러므로 “이같이 큰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이처럼 죄로 망가진 세상에 조처를 취하셨다는 사실, 이와 다른 세상이 장차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문제는 친히 만드신 후 완전하고 좋다고 선언하신 세상, 그런데 죄가 망쳐 버린 세상에 어떻게 찾아오시느냐 하는 것이었다. 세상을 원래 의도하신 바대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놀랍게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구원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된 일이다. 이 구원 안으로 들어갈 때, 자기 자신이나 자기 기분이나 자기 마음상태에 몰두하던 차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즉시 자기 자신을 영원한 세상에 속한 천국 시민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이 만드실 새로운 세상이 있다. 성경은 그가 큰 계획과 방안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영광과 경이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세상에는 죄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다. 아픔도 없고 질병도 없다. 다툼도 없고 싸움도 없다. 지금은 대립하는 짐승들이 그때는 한 자리에 누울 것이다. 평소 굶주리고 난폭했던 짐승들이 어린아이의 손에 이끌려 다닐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그림, 신약성경 뿐 아니라 구약성경이 제시하는 그림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들도 장차 올 세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장차 이루어질 놀라운 일을 일부 보았다. 주님도 자주 그 세상에 대해 가르치셨다. 자신이 다시 와서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세우실 나라와 그 나라에 일어날 놀라운 일들에 대해 늘 이야기하셨다. 그 나라에는 이삭과 아브라함이 앉아 있을 것이며, 다른 이들도 와서 놀라운 영광을 누릴 것이라고 하셨다.

 

신약성경에는 계속 그 나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베드로도 자주 그 나라에 대해 전했다. 오순절 이후 예루살렘에서 설교할 때도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르러 영광과 경이로 가득 찬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행3:19). 사도 바울도 역시 그 나라를 계속 고대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우리 영혼을 죄에서 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빌3:21). 계시록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의 성이 찬란하고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로 장차 올 세상을 묘사한다.

 

구원의 목표는 이처럼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드시려는 것, 그런 세상이 오게 하시려는 것이다. 베드로는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고 하면서(벧후3:13), 그 나라를 고대하며 앞당길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그 큰 날에 일어날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사람이 그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윗은 시편8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들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8:4-5).

 

이것은 장차 올 놀랍고 영광스러운 새 세상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때 사람은 피조세계의 주인이 될 것이다.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 그렇게 높아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반복하건대,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첫 번째 핵심 진술이다. 복음의 일차적 목적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몇 가지 일을 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일도 해주지만, 그보다 앞서며 그것을 넘어서는 엄청난 구상과 영광스러운 전망을 제시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이처럼 세상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시며 죄와 그 모든 결과에서 해방시키시려는 것이다. 온전하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려는 것이다.

 

이 주제를 살펴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같이 큰 구원”을 말하기 위해 아주 신중하게 단어를 선별한다는 점이다. 구원은 우주적인 계획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화목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엡1:10),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런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세우시고 완성하시기 위해, 마침내 그 나라를 이루시고 완결하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성은 흠 한 점 없이 완전무결한 곳이 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낙원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망쳐버렸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회복하고 재건하여 원래 의도하신 세상,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계시록을 읽되, 특히 21장과 22장을 읽어보시라. 이 모든 말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장차 올 완전한 세상을 향유하는 주체가 천사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천사가 아니면 누구한테 복종하게 하신다는 것인가? 사람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이다. “이같이 큰 구원”, 영광의 잔치, 장차 올 세상의 잔치가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불순종과 어리석음으로 고통과 아픔과 혼란과 적의와 전쟁과 삶의 모든 공포 및 죽음 자체를 자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우리를 위해 “장차 올 세상”이 준비되고 있다고, 한 번도 제자리를 이탈한 적 없는 거룩한 천사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저 밝은 천사의 영들이 아닌 우리를 위해 준비되고 있다고, 그러니 이 구원이 얼마나 큰 것이냐고 히브라서 기자는 말한다!

 

이 말이 동화처럼 들리는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에 있는 사실이다. 영광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것이다. 땅이 새로워지고 갱신될 때, 물질들이 타오르는 불의 뜨거운 열기에 풀어질 때, 모든 죄와 악과 불순물이 제거되어 온 세상이 완전해지고 의로워질 때, 그 새로운 땅 위를 거닐 것이다. 빛 가운데, 그의 찬란한 얼굴 빛 가운데 행할 것이다. 아들의 벗이 될 것이다. 하나님을 뵙고 즐거워할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노래하며 외치고 있는 거룩한 천사들이 수종을 받을 것이다(사6:3).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다.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살짝 본 자가 전해 준 메시지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형언할 수 없는 영광 가운데 살 것이며, 영원토록 그의 거룩함 임재 안에서 지낼 것이다.

 

- 로이드 존스, ‘히브리서 강해’, PP 84-90

출처: 청교도의길

 

출처: 자기부인 ..글쓴이..바퀴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

/ 재림; 서론

 

 

1. 재림에 대해 고찰해야 하는 이유

 

1) 성경이 수없이 재림을 언급하고 있다

 

재림은 엄청나게 중요한 주제다.

 

- 성경의 30분의 1은 재림에 대한 언급이다.

- 초림에 대한 언급 1번에 재림에 대한 언급은 8번의 비율이다.

 

2)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가르치셨다

 

마 24장과 25장은 이 교리만을 다룬다.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는 오직 이 주제를 위해서 쓰여졌다?

주님 자신이 재림을 강조하셨으며, 자주 언급하셨다.

마 24, 25장, 막 13장, 눅 21장.

 

알베르트 슈바이쳐-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 복음서는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묵시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초에 유행한 신학적 분위기는 모더니즘 혹은 자유주의로서 ‘예수’를 ‘역사적 예수’와 ‘바울의 그리스도’로 대비시켜 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묵시적 요소들을 빼버렸다. 예수는 도덕과 윤리, 행동과 행위만 가르쳤다고 했다.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을 제거해 버렸다. 이에 대해 슈바이처는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고, 이후 교회의 역사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소위 ‘역사적 예수’를 뒤엎어 버렸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복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3) 사도들도 재림을 가르쳤다

 

사도행전 첫 장부터 이 주제를 만나게 된다. 주님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였다(7절).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서신서에서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베드로는 벧후 3장에서 바울에 대해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주님의 날)이 임함에 관하여 말하였으되”라고 한다. 그들은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바울서신, 야고보서도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이 교리는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과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것은 복된 소망이자 교회가 고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가장 큰 동기가 된다. 베드로,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벧후3:17).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11-12)

 

2. 재림의 교리가 소홀히 여겨지는 이유

 

1) 영적 무기력

 

우리는 삶과 환경에 희생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 삶을 다른 일들로 가득 채워서, 이 복된 소망을 잊어버리게 하려 애쓰는 원수와 대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교리는 핍박과 환난의 때에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이 세상의 헛됨을 알게 될 때만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2) 재림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들

 

거짓 관점과 개념들 때문이다.

1설, 재림-죽음 가운데 데려가시기 위해 오시는 것(요14:1-3)

2설, 재림- 오순절날 교회 위에 그리고 교회 안에 임했을 때 일어난 일.(요14:17-18)

 

주님이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오신 것으로 해석.

 

3설,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괴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것. 주님의 오심을 유대 민족의 국가가 멸망하는 것에 국한시킨다.

 

3) 그리스도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

 

터무니없는 가르침에 대한 소심함과 신중함.

 

수세기 동안 재림의 날짜를 독단적으로 예언하곤 했다. 이런 가르침들의 별난 생각과 과장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재림의 교리를 전혀 고찰하지 않고 내버려 둠으로써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론을 만들어 내어 그것을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베드로의 말처럼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일이다(벧후 3:16).

 

3. 재림의 문제에 접근하는 바른 자세-균형

 

신중한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신중함이 그 문제를 완전히 피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해 균형 있게 읽는 것이 지혜롭다. 먼저 성경을 읽으라.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읽으라. 양쪽 입장 혹은 모든 입장의 글을 읽으라. 한쪽 입장의 글만을 읽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똑같이 경건하고 똑같이 학구적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면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읽고 최선을 다해 검토해 보아야 한다. 경고- 이 교리에 관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라. 배타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거룩함에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거나 재림과 관련된 운동을 조직하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교리는 결합되어야 한다. 한 가지만 전파하기 위한 운동을 조직한다면 당신은 결국 균형을 잃을 수 밖에 없다. 교회는 언제나 모든 교리를 전파해야 하며 특정한 교리들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4. 재림에 대한 서론적 접근

 

1) 재림과 연관해 사용한 용어들

 

묵시(apocalypse)- 계시, 수건을 벗기는 것, 벗겨진 수건의 개념

 

현현(epiphany)- 나타남 혹은 드러남

 

묵시는 우리 주님이 서 계시고 그 앞에 장막이 쳐 있다가 그 장막이 거두어져 우리가 주님을 보게 된다는 개념이다. 현현은 주님의 오심, 주님의 나타나심을 강조한다. 파루시아(parousia)- 임재. 주님이 그의 백성에게 다시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

 

하나님의 날- 벧후3:12, 주의 날- 살전5:2, 벧후3:10

주 예수의 날 혹은 그리스도의 날- 고전3:13

이 용어들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2) 재림이 일어나는 방식

 

1 인격적인 오심이다.

2 영적인 것일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 오신다.

 

영적인 오심- 오순절날 성령을 통해 오심,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시에 심판 가운데 “주님의 오심”, 지금도 여전히 영적으로 오심, 부흥의 때에 특별한 방식으로 교회에 오심,

 

육체적 오심- 재림 교리. “이 후에 인자가 --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26:64).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0-11).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초림과 재림은 둘 다 육체적인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계1:7)

 

3 재림은 가시적인 사건이다.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사건으로서의 재림은 완전히 비성경적이다.

 

4 재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번개의 번쩍임에 비유(마24:27). 도적이 밤에 오는 것에 비교(마24:43).

 

5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이다.

 

영광중에, 하늘 구름을 타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나팔 소리가 나매”(고전15:52) 왕의 왕, 주의 주로 오실 것이다.

 

재림에 대한 연구는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한다.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거룩한 삶을 촉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3) 재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당부의 말

 

그 연구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든다면 당신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쭐하게 되고 지성과 열정이 자극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연구 방식이다.

 

그 연구가 당신으로 하여금 무릎 꿇고 에배와 경배와 찬양을 드리게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방식의 연구이다. 그 일을 해냈다는 자기 만족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연구방식이다. 이것은 지성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위한 주제이다. 그것은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진리에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게 되기를 빈다.

 

출처 / 자기부인 /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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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라 selah; 시편과 하박국에 나오는 용어

 

 

셀라 selah : 성경의 시편(39편에 70여회)과 하박국(3장에 3회)에 나오는 용어. 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성경학자들은 <들어 올리다>, <높임>, <중지> 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살랄/salal> 이란 단어에서 유례한 음악적 지시어로 추측하고 있다. 예배에서 찬양하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악기 연주 중에 음을 높이는 것, 또는 노래하는 사람이 악기가 연주되는 동안 잠시 멈추는 용어로 추측하고 있다. 특정한 악기를 연주하라는 지시어로도 생각하는 등 연주나 찬양과 관련한 다양한 의미와 용도를 가진 음악적 지시어로 추측하고 있다.

 

* 셀라 Sela - 에돔의 몇몇 요새들의 이름.

 

* 셀라 Shelah

1) 셈의 후손인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에벨의 아버지이다.

2) 유다의 셋째 아들. 장자 엘(다말의 남편), 차자 오난, 셋째 셀라

 

* 셀라 Zela - 베냐민 지파의 영토 안에 있는 한 성읍.

 

(시 9장) “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에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3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새롭게 심판하셨나이다 5 이방 나라들을 책망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나이다 6 원수가 끊어져 영원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7 여호와에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9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1 너희는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지어다 1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그들을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13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14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17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 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18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19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주 앞에서 심판을 받게 하소서 20 여호와여 그들을 두렵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이 자기는 인생일 뿐인 줄 알게 하소서(셀라)”

 

(하박국 3장) “1 시기오놋에 맞춘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셀라)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 4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졌도다 5 역병이 그 앞에서 행하며 불덩이가 그의 발 밑에서 나오는도다 6 그가 서신즉 땅이 진동하며 그가 보신즉 여러 나라가 전율하며 영원한 산이 무너지며 무궁한 작은 산이 엎드러지나니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도다 7 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9 주께서 활을 꺼내시고 화살을 바로 쏘셨나이다(셀라) 주께서 강들로 땅을 쪼개셨나이다 10 산들이 주를 보고 흔들리며 창수가 넘치고 바다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높이 들었나이다 11 날아가는 주의 화살의 빛과 번쩍이는 주의 창의 광채로 말미암아 해와 달이 그 처소에 멈추었나이다 12 주께서 노를 발하사 땅을 두르셨으며 분을 내사 여러 나라를 밟으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의 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바닥까지 드러내셨나이다(셀라)" 14 그들이 회오리바람처럼 이르러 나를 흩으려 하며 가만히 가난한 자 삼키기를 즐거워하나 오직 주께서 그들의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나이다 15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 16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출처: 성경사전 및 인터넷자료

 

 

셀라 [selah]

 

요약 : ‘목소리를 높이다’, ‘찬양하다’의 뜻을 지닌 헤브라이어.

 

본문 : 구약성서 《시편》에 71회나 사용된 음악적 용어이다. 《시편》 3편 2절에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느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하박국》에서도 3회가 나온다. 하박국 3장 3절에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라고 되어 있다.

 

70인역성서 역자는 이 용어가 관현악단에게 올리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때 노래하는 사람은 조용히 하고 관현악단만이 악기를 연주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신호와 함께 영광송이나 축복송을 제창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셀라가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은 직후 잠시 중단할 만한 좋은 위치를 지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휴지부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있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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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해

 

주기도문의 배경 이해

 

 

예수님이 사셨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전문 교육기관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소규모 단위로 한두 명의 스승이 제자들을 입문시켜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 형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스타일의 교육에 익숙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랍비 제도입니다. 주로 랍비가 제자들에게 율법을 암기시키고 그것에 대한 간단한 해석을 주는 과정이 교육의 대부분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모든 부모의 소원이 다 비슷하듯이 당시 유대인들도 훌륭하다고 소문난 스승 밑에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자 열심이었고 스승의 문하에 들어간 사람들은 스승을 쫓아다니며 수년씩 가르침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그들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하여 존경받는 랍비가 되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명예였고 큰 성취였습니다. 그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씩 가슴에 새겨 그대로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그 가르침을 해설하는 해설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루는 예수님께 나아와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문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전통으로서 랍비들은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어서 이를 통해 그들 자신이 누구의 문하에 속한 사람인지 구별되게 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나름대로 규칙적이며 습관적인 기도를 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문은 다른 랍비들의 기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함께 질적으로 다른 많은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기도문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중에 놀라운 영감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수 없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기도문을 공부하기에 앞서 이를 통해 깨달아야 할 사실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기도에는 모범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고 구하는 것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즉 기도는 다른 우상 숭배자들의 그것들처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기를 원하시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대화이기에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는 규정이나 규칙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보다 깊은 만남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에 특별한 규정이나 규칙이 없다고 해서 모든 기도가 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먼저 기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을 제시해 주시면서 제자들과 청중들을 향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눈을 감고 기도할 때 무엇을 아뢰어야 할 것인지 알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서도 없이 무엇인가를 달라는 기도부터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경중이 있듯이 기도에도 먼저 기도해야 할 것과 나중에 기도해야 할 것이 있고 기도의 내용에도 경중이 있음을 주기도문을 통해 제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며 기쁘시게 하는 기도이며, 하나님과 보다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도인지 예수님께서는 최상의 기도의 모범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주기도문을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보면 그 안에는 무궁한 영적인 원리와 원칙을 발견하게 되며 또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건강한 기도였는지 잘못된 기도였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기도에도 훈련이 필요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면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사교적이며 말도 잘 하지만 기도할 때에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심지어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도 기도 시간에 기도를 하거나 대표기도 하는 것을 가장 큰 부담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간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기도를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잘 한다고 자부하는 성도들 중에는 또한 매우 잘못된 형태와 습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도에 대한 바른 가르침과 훈련이 부족하기에 생겨나는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이나 교리나 기독교와 관련된 다른 분야를 배우는 것만큼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나 훈련 받기를 꺼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슨 기도에 가르침이 필요하고 훈련이 필요한가 하는 물음을 던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일례로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모두가 랍비나 부모로부터 기도의 방법을 배우면서 자라납니다. 당시 유대 랍비들은 기도에 대한 규칙과 절차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기도할 때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고 자세는 어떠해야 하며 행동은 어떻게 해야 하고 심지어 기도의 음조와 가락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도의 규칙과 규범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할 때 잘못된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열여덟 가지의 기도문을 만들어 그것을 철저히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들의 형식적이며 타성에 젖어버린 신앙은 매우 잘못된 것이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도에 대해 훈련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받는 것은 신앙의 성장을 위해 매우 필요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매일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들을 똑같은 순서대로 읊어대는 수준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배우십시오. 기도를 훈련하십시오. 기도의 대상을 명확히 인식하는 훈련, 기도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는 훈련, 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꾸준한 훈련과 가르침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기도는 성도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비록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또한 철저히 인간이시기에 기도를 잊지 않으셨고 빠듯한 사역의 일정 속에서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구별하여 하나님과 교제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예수님의 사역의 원동력이었고, 또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치셨을 때 제자들이 종용히 나와 그 비결을 물었을 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사역 내내 항상 깨어 기도할 것을 끊임없이 권면하고 명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 신앙 생활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항상 깨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기도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열심히 할지라도 기도 생활에 소홀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진짜 병든 사람인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인간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과 마주하고 앉을 때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아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그만큼 우리에게 큰 힘과 능력을 주며 영광과 존귀를 안겨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날마다 주님 앞에 나가 주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서 은혜의 보좌 앞에 마음을 열고 얼굴을 구하며 교제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혜와 은총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항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주기도문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통하여 기도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 응답받는 기도에는 그에 맞는 모범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성숙한 기도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기도는 성도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요소이기에 그것이 삶이 되고 일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가지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하나씩 배워가면서 우리의 기도의 수준이 높아지고 보다 성숙된 기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는 기도,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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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18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베드로전서 4장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그대로 보면 됩니다
노아의 때 순종하지 않던 자들이 옥에 갇혀 있는데 예수님이 이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는 율법이나 계명이 없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지으심을 후회하셨다고 나옵니다

노아의 때 방주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자들 즉 전 세계 모든 인구입니다
어마어마한 자들이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듣거나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던 백성입니다
심판의 기준이 없는 시대에 살던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영으로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으로는 행위에 대하여 심판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영과 육의 구원이 분리된 것입니다
영이 구원 받으면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기에 불못 심판은 면합니다

그러나 육체로 행한 일에 대하여는 별도로 상벌 심판 즉 음부냐 낙원이냐의 심판이 갈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든 자들의 영들이 이런 기회가 온다고 말하기보다는

노아의 때 불순종하던 자들로 단정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이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그대로 보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노아의 때 죽은 영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상황이 다르듯이 하나님도 그 상황을 보시고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조리 쓸어버리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죽은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니까 살아 생전에 복음을 들었다고 해석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억지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일 뿐만아니라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옥에 갇혀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으며 그들 또한 영으로는 구원을 얻지만

육신으로 행한 보응은 반드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곳은 음부와 낙원입니다

악을 행한 자는 음부에, 선을 행한 자는 낙원에 가게 됩니다

육체의 심판- 낙원과 음부
영의 심판 - 불못과 불못에서 구원
복음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은 영의 구원을 얻지 못함으로 인하여 불못의 영벌에 처해집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은 믿는 자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마라나타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O1TM/42847

 

/ 목사, 목양, 목회자의 의미는?

 

 

[질문] : 목회자의 사명은 목양으로 알고 있는데 성경적으로 따져 한자로 牧羊과 牧養 중에 어느 의미에 해당됩니까? 그리고 목사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목회의 자격을 득한 사람으로, 목회자는 목사로서 목양을 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목사가 교회를 개척해서 소속 교인들을 섬기며 목회(목양)하는 것보다 목사 자신의 개인 사역(私伇)에 더 집중하여 목회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답변] : 성경이 말하는 목사와 오늘날 목사가 맡은 직분이 다릅니다. 우선 그 단어의 의미부터 그러합니다. 성경에 목사라는 단어는 딱 한번만 나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So Christ himself gave the apostles, the prophets, the evangelists, the pastors and teachers.- 엡 4:11)

 

여기서 목사는 단순히 목양(pasturing 양의 꼴을 먹이는 즉, 성도의 어려운 문제들을 기도와 현실적 도움으로 섬기는 일)만 하는 자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는 목양뿐 아니라 본문의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교사의 역할까지 다 감당합니다.

 

현대목사의 직분에 가장 근접하는 의미는 딤전 5:17에 나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교인들과 그 공동체를 잘 다스리되 특별히 말씀으로 잘 가르치는 장로(elder)를 더 존경하라고 합니다. 바로 오늘날의 목사입니다.

 

교회가 행할 일을 크게 예배, 교육, 교제, 봉사, 선교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모든 일을 총괄해서 지도하는 자가 (담임)목사입니다. 일부 직무만 전념할 때는 그 직무를 앞에 붙여서 교육목사, 교구목사, 행정목사 등으로 구분합니다. 특정한 업무에 집중해도 결국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이 따릅니다. 따라서 목사의 한자적 의미는 양떼를 돌본다는 牧羊과 말씀으로 영양을 공급하며 자라게 한다는 牧養 둘 다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목회자의 의미는 조직교회를 맡아 목양하는 목사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교회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기관에서 풀타임으로 섬기는 전임사역자, 영어로는 minister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초대교회의 상황에선 안수를 받지 않아도 오늘날의 목회자는 물론 담임목사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아직은 성경을 비롯한 기독교 체계가 완비되기 전이라 그렇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은 정경이 확정되어 있고 교회가 담당하는 역할이 초대교회와 달리 복잡 다양해졌습니다.

 

요컨대 목회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훈련 받는 일이, 특별히 성경을 풀어서 가르치고 설교하려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정의 필수적인 교육을 받았고 목회자(전임사역자)로써 기꺼이 평생을 헌신하기로 서약한 자를 섬기는 교회(그 교회의 소속교인들)가 공식적으로 인증해주는 예식이 안수입니다. 목회자가 되는 구체적인 자격조건과 안수절차는 교단마다 다릅니다.

 

어쨌든 모든 목회자들은, 그 중에서 조직체 지역교회를 섬기는 안수 받은 목사는 더더욱 목양(두 가지 의미 다)에 평생을 헌신 충성해야 합니다. 자신의 현실적 유익과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욕심을 완전히 버리고 초대교회의 사도 같이 목회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미혹된 영혼을 구원의 은혜 안으로 초대하고 그 은혜 안에 들어온 양 떼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요10:1-18의 선한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참조) 그러지 못하는 목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맨 먼저 엄격한 책임추궁을 당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만 저주 정죄했듯이 말입니다.

 

신자들도 단순히 목사들만 의지하지 말고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서 거짓 목자를 분별하여서 교회를 올바르게 세워갈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도 초대교회처럼 그렇게 말씀에 바로서고 진정으로 헌신된 일반 신자들을 영적지도자로 세우고 목양에 적극 참여시켜야 합니다.

 

2/29/2020

 

http://blog.daum.net/dfgiyo/6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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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용어 바로알기]

/ ‘할렐루야’와 ‘알렐루야’

 

‘알렐루야’는 헬라어·라틴어로 번역 과정서 나와,

개신교는 원래 발음인 ‘할렐루야’를 공식 사용

 

 

‘아멘’만큼이나 많이 사용되는 교회용어가 ‘할렐루야’다. 할렐루야는 예배뿐 아니라 성도들 간의 인사말로도 쓰인다. 히브리어인 할렐루야는 두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다. ‘찬양하다’라는 뜻의 동사 ‘힐렐(hillel)’의 명령형인 ‘할렐루(hallelu)’와 하나님이란 뜻의 ‘야훼(Yahweh)’를 축약한 ‘야(yah)’를 합친 말이다. ‘야훼(하나님)를 찬양하라’란 뜻이다. 하지만 ‘알렐루야’가 할렐루야를 대신해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부활절 칸타타로 쓰이는 찬양곡이나 복음성가 가사에서 종종 알렐루야를 본다. 같은 오라토리오지만 헨델의 메시아 합창은 할렐루야로, 하이든의 천지창조는 알렐루야로 부른다.

 

그뿐만 아니라 원어 성경을 보면 구약은 할렐루야를, 신약은 알렐루야로 쓰고 있다. 할렐루야라는 말로 시작해 마지막을 할렐루야로 끝내고 있는 시편 146편부터 150편을 흔히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부른다. 이 시편에서 할렐루야라는 말은 23번이나 등장한다. 알렐루야는 헬라어 신약성경에서 쓰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19장에 4번 나온다.(계 19:1, 3, 4, 6)

 

할렐루야와 알렐루야가 혼용되는 데는 히브리어인 할렐루야를 신약시대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하고, 이것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생긴 문제다. 헬라어에는 히브리어인 할렐루야에 쓰인 강한 ‘ㅎ’ 발음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강하게 발음을 하라고 쉼표를 뒤집어 놓은 표시(‘)를 써서 ‘알렐루이야(‘ , ‘allelouia)’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라틴어는 헬라어에서 사용하는 격음을 나타내는 부호가 없다. 그냥 ‘알렐루이야(Alleluia)’라고 쓰게 된 것이다. 이런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할렐루야가 알렐루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둘은 의미상 차이가 전혀 없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다만 라틴어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가톨릭은 알렐루야를 공식 용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개신교는 원래 발음인 ‘할렐루야’를 교회의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상윤 목사(한세대 외래교수)

 

http://blog.daum.net/dfgiyo/6140614

성경에 나오는 153 물고기 숫자의 의미

 

 

153 숫자는 모나미 볼펜에 적힌 숫자로도 유명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도 아주 유명한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명령을 하시자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하자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고기가 잡혔는데 나중에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153마리라고 명시하였던 것입니다.(요한복음 21장) 그래서 자료를 바탕으로 153의 상징과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그물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비유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물은 백성을 취하고, 보호하는 선한 수단이었다. 그물은 예수님을 따른 첫 제자들의 직업과 남은 자들의 장차 사도직과 관련되었다. 물고기를 잡는 그물은 이제 영적인 그물로 바뀐다. 대표적인 보기가 천국비유이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마 13:47).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전하며 ‘그물’을 빗대신다. 그물 안에는 물고기로 가득 차지만, 어부는 취사선택을 하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낸다.

 

그물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역 그 자체이다. 열 두 사도에 대한 공통된 이미지는 그물로,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를 뜻한다. 또 찢어지지 않는 그물은 교회를 의미하였다. 2세기 말 이후 세례는 낚시 바늘과 그물에 의한 물고기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어부는 세례자이고, 물고기는 세례 받는 자이다. 물고기를 가리키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시다’(Jesus Christos Theou Hyios Soter)라는 신앙고백의 머리글자 모음이다.

 

갈릴리 어부들은 물고기를 잡는 그물을 버리고, 사람을 구원하려는 영적 그물을 택하였다. ‘인생의 그물’을 버리고, ‘그물의 인생’을 얻은 것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교회를 뜻하는 그물 안에 가득 잡힌 물고기 153마리를 다양하게 이해하였다.

 

퀼리로스는 153이란 숫자 중 완전수 100은 가득 찬 이방인이고, 50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이며, 3은 삼위일체의 영광이라고 풀어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153은 ‘1+2+3+4 .. +17’의 합계인데, 이는 율법(10계명)과 은혜(7은사)를 뜻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오기로 감동된 모든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제롬은 갈릴리 바다의 모든 종류의 물고기이며, 어느 날엔가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이게 된다고 해석하였다.

 

이런 기도문이 전해진다. “주님 저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당신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내던져짐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 누군들 그물의 삶에서 예외일 수 있을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153하면 번제단을 연상한 것이 상례였다. 특별히 요한은 대제사장과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153과 번제단의 유기적 관계에 정통해 있었다. 번제단은 그 모습이 3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 단부터 각각 그 높이가 1규빗, 5규빗, 3규빗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153하면 번제단을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한은 153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고자 했을까? 그것은 언제나 번제단에서 만날 수 있고, 번제단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번제단이란 무엇인가? 죄가 사해지고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 요한은 153을 통해 번제단 자체가 되시고 진정한 생명과 축복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슴마다 깊이 새기며 그분께 순종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베드로가 잡은 고기가 백쉰세 마리라고 적어놓고 있다. 왜 하필 성경은 153마리를 잡았다고 굳이 언급을 하였을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다고 하면 될 것을??

 

고기 잡던 베드로를 부르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으며 부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시고 요한으로 하여금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물고기라는 표현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다. 5절에서는 '고기' 6절에서는 '물고기' 9절에서는 '생선'이라 표현되어있고 헬라어로도 각기 다르다. 5절의 고기는 '프로스파기온' 6절의 물고기는 '익투스' 9절의 생선은 '옵사리온'이다.

 

프로스파기온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대접하는 생선을 지칭한다. 옵사리온은 말린 생선, 또는 작은 생선을 말할 때 쓴다. 익투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나오는 일반적인 생선을 말한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먹여주시는 특별한 생선을 의미함과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박해가 심했던 초기 기독교 시절 기독교인들끼리의 암호표시로 물고기를 사용하였으며 물고기를 말하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앞 글자를 딴 것이다. 이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휴이오스 소테르(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이 고백은 베드로가 가이사랴빌립보에서 했던 고백과 일치한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러한 의미로 본문을 다시 한 번 해석을 해본다면 주님께서 베드로에 질문하신다. '너희에게 귀한 것이 있느냐?'(프로스파기온) 주님의 명령대로 우편에 그물을 던져서 잡은 것이 바로 주님(익투스)입니다. 그들에게 잡힌 153마리의 생선은 글자로 보나 숫자로 보나 주님 임재를 나타냅니다(익투스)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베드로에게 몸소 다시 나타나주시고 주의 임재를 보여주신 것이다. 주님의 임재를 확인해주시고는 옵사리온으로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시는 예수님을 확인하게 된다.

 

또한 게마트리아로 해석을 한다면 히브리어와 헬라어에는 각 알파벳에 숫자 값이 정해져있다. 각 문자에 정해진 숫자들을 더해서 그것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네로 황제의 헬라어 알파벳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666이라는 숫자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히브리어 '베니 하 엘로힘'의 알파벳 숫자들을 더하면 153이 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베드로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고기나 낚고 있으니 주님께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단어를 주신 것이다. 당시에 베드로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겠지만 예수님은 요한을 통하여 그 숫자를 기록하게 하시고 현대의 우리로 하여금 그 의미를 묵상하게 하신다.

 

또한 153이라는 숫자는 특이한 의미를 갖는 숫자이다. 즉 1의 세제곱 1, 5의 세제곱 125, 3의 세제곱 27을 더하면 153 이 된다. 이런 숫자를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고 한다. 큐브는 세제곱을 의미하며 또한 정육각형을 의미하고 지성소를 의미한다.(지성소는 높이 넒이 길이가 똑같다) 따라서 153이라는 숫자는 지성소 즉,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 하고 고향으로 떠나갔지만 주님께서는 찾아주시고 하나님께서 앞으로 항상 함께하실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이러한 트리플 큐브 넘버는 153과 370 371 407 이렇게 네 개 밖에는 없다.

 

과학자들은 371의 의미를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탄 날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가 온 날 부터 365일간 방주에 있었으며 방주에 타고서 7일 째부터 비가 내렸으니 371동안 방주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양력을 사용하지 않고 음력을 사용하였으므로 그 보다는 적은 날 동안 탔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요한이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 마리수를 153마리라고 일부러 적어 놓은 이유는 위와 같이 주님, 하나님의 아들들, 지성소(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복음서에 모두 나온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주신 물고기 역시 익투스(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이며 그 때에 같이 주신 것이 떡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역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고기뿐만 아니라 떡도 주신다.

 

(요 21:9)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요 21: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셔서 예수님께서 그들과 또한 우리에게 영원히 같이해주신다는 메시지를 떡과 함께 주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린다."

    

 

 

이 수가 성경에 중요한 의미로 나오는지는 나중에 알았죠. 부활하신 예수가 베드로를 찾아옵니다. 밤새 고기 한 마리 못 잡은 베드로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봐라' 라고 하시고,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니 정확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혔다고 하는데요. 요한복음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성경 중에서도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의 행적의 핵심 중의 핵심을 기록했다고 하는데도, 많이 잡았다.. 정도로 기록하지 않고 굳이 한 구절을 할애하여 잡은 물고기 숫자를 언급하는 것이 좀 이상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 21:11)

 

그 이유는, 153이라는 수가 수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수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의 숫자 값이 153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많은 명언 중 베드로에게 이야기한 명언이 바로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이었죠. 이것뿐이라면 좀 끼워 맞춘 느낌도 있겠습니다만,,,

    

 

 

153은 17번째 정 삼각수입니다. 17의 숫자 값을 더한 8은 게마트리아 수신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시작'의 수이기도 하고요. 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신기한 것은 153은 수학에서 'Triple Cube Number'라고 부르는 수입니다. 각 자리수의 세제곱(^3)의 합이 자기 자신과 같아지는 수를 의미하며, 100부터 999까지 4개가 존재합니다.

 

앞서 설명했듯, 세제곱의 수는 성스러운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 성스러운, 성스러운, 성스러운 숫자를 더해서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숫자는 지극히 성스러운 수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모든 Triple Cube Number들을 살펴봅니다.

 

153: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베드로가 낚은 물고기의 수.

 

370: 37개의 다윗별 10개로 이루어진 정삼각형(성경에서의 의미는 아직 모름).

 

371: 노아가 방주 안에 머물러 있었던 정확한 날짜. 거룩한 공간이며 새 출발을 의미하는 공간.

 

407: 창 1:1에서 하늘 '과' 땅을 창조했다는 그 '과(and)'의 숫자 값. 히브리어로 and는 알파벳의 알파와 오메가로 이루어짐."

 

"성경에는 나오는 153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사람들을 낚아 그들을 양육하여 장성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출처: 창골산 봉서방

 

http://blog.daum.net/dfgiyo/6140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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