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신약 서신서 전체를 이해하려면 갓 태어난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부어 주신 사건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령 강림은 성경에 기록된 결정적인 사건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즉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며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며,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출생, 죽음, 부활, 승천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떠나서는 사도행전이나 신약 서신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초대교회의 삶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호소는 전부 성령의 교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빌립보 4장을 읽어보라. 성령이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충 읽으면 성령 교리와 아무 상관없는 본문처럼 보일 수 있다. 1-3절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4절에서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면서 기쁨을 이야기 하고, 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하면서 인내를 이야기하며, 연이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평강”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기쁨과 인내와 평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빌립보 4장은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등- 에 대한 주석이다.

 

-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신약을 관통하는 교리이다. 기쁨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삶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읽어 보면,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참으로 기뻐하는 놀라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들은 환란 중에서도 기뻐했다. 요한 계시록도 어려움과 역경과 시험과 환란 속에서도 기뻐하도록 그 당시 교회와 이후 모든 시대의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빌립보서는 특히 기쁨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바울의 실제 의도였다. 바울은 1장에서 교회내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한 불일치의 문제도 그리스도의 겸손과 성육신이라는 위대한 예를 통해 해결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장에서는 에바브로디도의 와병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3장에서는 ‘이단과 잘못된 삶,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질문을 다루었다. 그리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 문제를 다루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본문에서 계속해서 이 주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기업이다. 그리스도인이 불행하게 사는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부인하는 것이다. 믿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을 빼앗기는 것이다. 생사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가 한 말은 이것이다. “살든 죽든 나의 변함없는 관심사는 너희가 바로 서는 것이며, 너희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참 신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쁨을 알고 있으며, 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1. 기쁨의 특징이 무엇인가?

 

1) 기쁨의 본질

 

① 기쁨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기쁨과 단순한 소극적 체념을 잘 구별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 체념의 정신을 그리스도인의 용기나 견고함이나 기쁨과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명령은 마치 소집 나팔소리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것이다. 절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다. 인류가 과학적이 되면서 심리적인 해결을 영적인 해결로 착각하는 교활한 시험에 빠질 위험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감정을 숨기려는 성향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들은 무관심의 방어막만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태도는 그런 태도가 아니다. 무관심의 방어막 뒤에 숨어 버리는 사람은 기뻐할 수가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역동적인 기쁨이며, 감정의 요소가 개입된 기쁨이다. 그 속에 힘이 있고 생명이 있다. 기쁨은 환희의 영이다.

 

② 이 기쁨은 특정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다. 신약성경은 심리적 공감은 해주되, 단순히 행복을 권유하거나 힘을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힘을 내게 하려고 복음을 제시하거나 잠시 행복해지게 하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짓이다.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이 기쁨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기독교 진리와 교리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기쁨이다. 바울이 “주 안에 서라”라고 말한 후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에 기초하지 않은 기쁨은 기쁨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우리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는 이 사실에 있다.

 

2) 이 기쁨의 장애물

 

① 기쁨의 기제 자체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 등이 성령의 열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기뻐하라니,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성령의 열매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행동과 연결되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과 신비하고 금욕적인 관상의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간의 대립은 처음부터 있어 왔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5:16) 한 장에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나오는 것이다. 나는 기쁨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서 지시하고 인도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이 기쁨의 열매를 내 삶에 심어 주신다. 둘 다 해야 한다. 진리를 묵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이 우리 삶에 기쁨을 부으신다.

 

②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오늘날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공허하고 죽어 있는지 참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이 점을 완벽하게 짚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3, 6) 심령의 거지가 한없는 영적인 부요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없어서 너무나 불행했던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려면 완전한 빈손으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이 아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완전히 가난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만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손에 무언가 잡고 있으면 주님께 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놓아야 주님의 기쁨을 받을 수 있다.

 

③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을 잃는 이들이 많다. 기쁨을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한다. 영혼이 온전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주님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성령이 근심하시고 떠나 버리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른 실천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기는 불가능하다.(마6:24)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 그러면 성령의 기쁨이 임할 것이다.

 

④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는 것이다.

 

⑤ 그리스도와 기도로 교제하며 만남의 끈을 놓치지 말 것을 명령한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자기 영혼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아뢰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다. 기쁨의 근원, 기쁨의 원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꺼이 자주 나아가야 한다.

 

⑥ 상황에 휘둘리지 않음으로써 주님과 만남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많은 일들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그의 임재와 기쁨을 빼앗아 간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로 주저앉게 만드는지요!

 

3) 기쁨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묵상하라.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생각하라. 주님이 장차 하실 일, 인생을 향한 신약성경의 설계와 계획, 최후의 결과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비결이다.

 

다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은 얼마 가지 않아 말라붙게 되어 있다. 굳이 복음이 없어도 일이 잘 풀리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놓게 될 날이 온다. 밀려난 후에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기쁨과 행복을 찾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주 안에 있는 이 기쁨뿐이다. 이 기쁨은 안전하고 확실한 것,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래서 세상이 손댈 수 없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어떤 세력도 손댈 수 없는 곳에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가진 것을 전부 빼앗겨도 여러분의 영혼과 영원한 운명,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실패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 갈보리 언덕을 찾아, 그가 흘리신 보혈을 찾아, 여전히 나를 씻어 주는 보혈을 찾아 돌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자신을 깨끗이 씻어주신 것을 깨닫고 기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 성령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쁨을 회복하게 되어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든지 죽든지 죄를 지었든지 아니든지, 실패했든지 아니든지, 무슨 일이 닥치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 바퀴

 

http://blog.daum.net/dfgiyo/6141311

 

 

(마 13:8)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백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의미를 우리 개념으로 보면 제대로 해석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 식 개념의 백, 육십, 삼십의 숫자를 사용하신 주님의 의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1. 백배의 결실

 

히브리어 백은 מֵאָה(메아) 인데 코프(ק)라는 알파벳은 숫자 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코프는 알파벳 쟈인(ז)과 카프(כ)의 합성된 것으로 보는데 쟈인은 숫자 7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카프는 20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쟈인(7)은 하나님의 숫자로 우리의 안식, 생명의 말씀, 양식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으며 카프(20)은 '하나님의 손' '돌보시는 능력' '권세자'가 되심을 상징합니다. 숫자 백, 코프(ק)가 갖고 있는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추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권세를 그 발 아래 무릎 끓게 하시고 만물의 주 즉,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따라서 백배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시는 권세자(왕)로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시며, 영원한 안식이 되시는 결실을 얻게 된다는 것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 백배의 결실의 의미입니다.

 

2. 육십 배의 결실

 

히브리어 육십은 שִׁשִּׁים(쉬쉬임) 인데 사메크(ס)라는 15번째 알파벳이 숫자 육십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의미를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안에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육십(사메크)는 민수기 6장 23-27절의 말씀에 의거하여 '제사장의 축복권'으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따라서 육십 배의 결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될 '제사장의 축복권'을 얻게 될 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삼십 배의 결실

 

히브리어 삼십은 שְׁלֹשִׁים(쉘로쉬임) 인데 알파벳에서는 라메드(ל)라는 알파벳이 숫자 '삼십'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파벳 중에 중심에 위치한 12번째 알파벳으로 모든 알파벳 중에 가장 높게 우뚝 서서 다른 알파벳들을 다스리는 왕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형문자로 사용될 때는 지팡이 그림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목자'가 되시므로 그들을 돌보시고 가르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4장 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신 말씀과 연관하여 생각합니다.

 

따라서 삼십 배의 결실은 하나님 여호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 식 개념에서 숫자적 개념을 해석하여 마태복음 13장 8절 말씀을 해석하면, 좋은 땅이 된 심령은 하나님의 생명의 씨를 받아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될 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속한 거룩한 백성이 되는 축복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따라서 우리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 자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서, 하나님의 무소 부재하심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는 제사장의 축복을 누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모시는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 가진 영광을 나타내는 좋은 밭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출처: House of Jesus /jesuslov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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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장이다.

1.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2.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3.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4.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5.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6.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4.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


참으로 묘한 사건이다.

귀신들은 어찌하여 돼지떼의 몸으로 들어가길 원했으며 왜 바다로 떨어져 죽었는가?

과거에 친분이 있는 어느 목사님에게 이 질문을 하였더니...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내용은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말라.

우리가 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성경상에 내용이 없는 것이다." 하셨다.

하지만 그 목사님의 의중과는 달리 오늘의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돼지 몰살사건"으로 지대한 관심과 의문을 이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본문의 귀신들린 사람은 "거라사인의 지방"에 사는 사람이라 기록됐지만

마태복음에는 "가다라 지방"이라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20절에...귀신들린 자는 자신에게서 귀신이 떠난 후에 자신의 당한 일을...

"데가볼리"에서 간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가 살고 있는 "거라사"는 "데가볼리"라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데가볼리는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10개의 도시 즉...

"데카폴리스"라는 도시들을 말함이다.

이 도시에는 유명한 제우스 신전...아르테미스 신전 등 많은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자들과...

헬라문화를 기반으로 온갖 우상과 이교적 색채가 난무하는 그런 곳이었다.

본문의 귀신 들린자가 사는 거라사 지방은...

아마도 이 데카폴리스 안에 있는 한 지역으로 추측할 수 있다.

13절에 이천마리나 되는 돼지가 떼죽음을 당한것으로 보아...

이 곳은 주로 돼지를 집중적으로 사육하는 지역임을 알 수 있고...

돼지를 부정한 음식으로 정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항하는...

"이방"임을 여러 정황상 자명하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부정한 지역으로 예수께서 들어가셨고...

거기서 귀신들린 자가 예수를 마중을 나온 것이다.

2절에..."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그리고 예수는 마중나온 그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주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라고 응수하면서 무슨 이유인지 돼지떼 안으로 들어가길 원했으며...

예수께서 허락하자 귀신들은 돼지떼로 들어갔고...

이천마리의 돼지떼는 귀신과 함께 바다로 다 돌진하여 죽었다는 내용이다.

귀신들은...사람에게서 나오라는 예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돼지의 몸속에서라도 기거하겠다는 속셈으로 그리한 것 같은데...

왜 귀신들은 돼지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었는가?

거라사 지역은 이방색이 짙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부정한 장소이고...

9절에 보면 "군대"라는 이름의 수 많은 귀신들이 부정한 동물인 돼지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그렇다면 "바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은 성경에서 "혼돈...흑암"을 의미하며...

특히 요나가 배에서 떨어져 바닷속 깊은 곳으로 빠졌을 때 그 곳을 "스올"이라 명했다.

스올은 "지옥과 음부"이다..죄로 인해 생긴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다는 "죄와 사단"이다.

계시록은 이것을 더욱 적나나하게 드러낸다.

계시록 13장을 보면 "사단 곳 옛뱀"이 기어 올라오는 장소가 바다이다.

그리고 계시록의 이 말씀은 구약의 다니엘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은 환상을 보는데 바다에서 네 짐승이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것을 계시록이 reconfirm‎‎한 것이다..이런 의미에서 바다란 "사단이 사는 장소"를 말한다.

또 시편은...출애굽때 "홍해바다"를 가른 사건을 사단을 파괴한 사건과 동일시 하고 있다.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


용의 머리를 깨뜨렸다는 말은 바로...

“너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라는 창세기의 말씀을 역시 reconfirm‎‎한 것이다.

예수님도 배 안에서 풍랑이 일자 바다를 꾸짖고 잠잠케 했다.

또...사단의 실체인 풍랑과 싸우시고 파도를 제압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을 구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다.

지금도 예수께선 인생의 바다인 우리의 삶속에서 사단을 제압하고 계신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더러운 귀신이 더러운(부정한) 돼지의 몸으로 들어가서...

결국에는 더러움의 극치인 사단의 본거지인 "바다"로 돌격하여 몰살시킨 사건은...

주님이 용(사단)의 머리를 깨뜨리고 승리하셔서...

사단의 올무에 걸려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다시 구하신 그 분의 사역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든 것은 귀신의 선택이 아니라...

귀신들을 돼지 안에 결박하시고 그들의 본고장인 바다 즉, 음부로 쫒아 내신 사건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황으로 본다면 7절에 귀신이 예수께 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단순히 생각하면...사람의 몸에서 기거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귀신에게...

당장 그의 몸에서 나오라는 예수의 명령이 야속하여...

그저 "내 일에 상관마라!" 하였을 것이라 단순히생각할 수있지만...

거라사 지역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려는 사단의 계략 앞에...

방해꾼으로 서 계신 예수님이라는 picture를 볼 때...

"자신의 일에 상관 말라"는 귀신의 말은...

사실...전인류가 사단의 계략으로 인하여 "죄"에 삼키워졌는데...

다시말해...사단의 노예가 되었는데...

마치 귀신들린 그 사람처럼 세상을 집어 삼키려 하고 있는데...

"예수인 당신이 지금 나의 사역을 방해하고 있다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거라사 지역으로 가신 사건은...

주님이 사단의 세력이 모두 장악해 버린 이 땅에 오신 사건과 비교될 수 있다.

사단이 모두 장악해 버린 이 땅에...

어느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남루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다.

그러자 그 분의 정체를 아는 사단은 비명을 지른다.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


주님은 사단이 우리의 몸에서 떠나가게 한 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비하신 지옥(바다)으로 돌려 보내신 일도 하신 것이다.

주님의 승리는 이것이다.......

악의 세력인 거라사( 이 세상)를 다시 찾으셨고...

귀신들린 우리를 다시 찾아 데가볼리 전지역에 걸쳐 "증인"이 되게 하셨고(20절)

귀신의 세력을 음부에 못박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격속에 벅차있을 때 찬물을 끼었는 구절이...14절에서 17절이었다.

여기서 부터는 잘 보아야한다.

"(돼지를)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


요한복음 1장11절과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


주님은 사단을 음부에 잡아 넣기 위해 오셨는데...

인간은 영원한 멸망을 향해 달려가길 원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라는 천국의 도래를 두려워하여...

예수께 제발 떠나시기를 간구한 이유는 도대체 무언가?

그들이 귀신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본문 3절부터 보면...

동네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두려워 그를 쇠사슬로 채웠으나

워낙 힘이 세서 쇠사슬도 소용없고 귀신을 진압할 힘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은 귀신을 두려워 했고 예수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예수는 그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자신들의 재산인 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귀신도 싫지만 자신들의 재산을 잃는 것은 더 싫은 것이다.

차라리 귀신과 함께 자신들의 돼지들이 보존되는 것이..

사단을 물리치는 예수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도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와 먹고 사는 일을 선택하라"

필자는...교회에게도 말하고 싶다.

"귀신도 쫒고 돼지도 살리자! 그렇게 할 수 있다!"...를 외치는 지금의 교회들이여...

물질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주님을 사용하지 말라!"

돼지는 물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돼지는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한 짐승이다.

저번에 "간음"이란 글에서도 밝혔듯이 우리가 행하는 영적 간음들...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생각.. 예수가 별로 필요없는 나날들...

눈앞의 행복과 영화가 더 즐거운 사람들...

그것이 거라사 사람들의 모습이었고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니다...성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성도는 죄를 지을 선택이 이미 없다.

죄에 속한 자는 멸망으로 갈 자들 밖엔 없다...성도는 그런 선택이 없다.

만약 성도가 죄를 선택한다면 환도뼈의 부러짐은 각오하여야 한다.

멸망으론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하나님은 결국 야곱처럼 우리를 끌고 가신다.

그래서 야곱이 마지막 한 말은..."험한 세상 살았습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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