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빌립보서 강해']

/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신약 서신서 전체를 이해하려면 갓 태어난 예루살렘 교회에 성령을 부어 주신 사건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령 강림은 성경에 기록된 결정적인 사건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즉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며 홍해와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며,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출생, 죽음, 부활, 승천과 연속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떠나서는 사도행전이나 신약 서신서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성령의 능력이 초대교회의 삶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호소는 전부 성령의 교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빌립보 4장을 읽어보라. 성령이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대충 읽으면 성령 교리와 아무 상관없는 본문처럼 보일 수 있다. 1-3절은 사랑에 대한 위대한 주석이라고 할 수 있다. 4절에서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하면서 기쁨을 이야기 하고, 5절에서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고 하면서 인내를 이야기하며, 연이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평강”을 이야기한다. 사랑과 기쁨과 인내와 평강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빌립보 4장은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등- 에 대한 주석이다.

 

-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은 신약을 관통하는 교리이다. 기쁨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삶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기쁨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16:22)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읽어 보면, 사람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참으로 기뻐하는 놀라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들은 환란 중에서도 기뻐했다. 요한 계시록도 어려움과 역경과 시험과 환란 속에서도 기뻐하도록 그 당시 교회와 이후 모든 시대의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빌립보서는 특히 기쁨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바울의 실제 의도였다. 바울은 1장에서 교회내의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한 불일치의 문제도 그리스도의 겸손과 성육신이라는 위대한 예를 통해 해결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장에서는 에바브로디도의 와병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3장에서는 ‘이단과 잘못된 삶, 잘못된 믿음이 어떻게 기쁨을 빼앗아 가는가?’라는 질문을 다루었다. 그리고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 문제를 다루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본문에서 계속해서 이 주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기업이다. 그리스도인이 불행하게 사는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을 부인하는 것이다. 믿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을 빼앗기는 것이다. 생사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가 한 말은 이것이다. “살든 죽든 나의 변함없는 관심사는 너희가 바로 서는 것이며, 너희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참 신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쁨을 알고 있으며, 이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1. 기쁨의 특징이 무엇인가?

 

1) 기쁨의 본질

 

① 기쁨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기쁨과 단순한 소극적 체념을 잘 구별해야 한다. 스토아 철학의 소극적 체념의 정신을 그리스도인의 용기나 견고함이나 기쁨과 착각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명령은 마치 소집 나팔소리와 같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것이다. 절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기쁨은 단순히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다. 인류가 과학적이 되면서 심리적인 해결을 영적인 해결로 착각하는 교활한 시험에 빠질 위험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감정을 숨기려는 성향이 생겨난다. 이런 사람들은 무관심의 방어막만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가 말하는 태도는 그런 태도가 아니다. 무관심의 방어막 뒤에 숨어 버리는 사람은 기뻐할 수가 없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역동적인 기쁨이며, 감정의 요소가 개입된 기쁨이다. 그 속에 힘이 있고 생명이 있다. 기쁨은 환희의 영이다.

 

② 이 기쁨은 특정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이다. 신약성경은 심리적 공감은 해주되, 단순히 행복을 권유하거나 힘을 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힘을 내게 하려고 복음을 제시하거나 잠시 행복해지게 하려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하는 짓이다. 우리는 오직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이 기쁨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기독교 진리와 교리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기쁨이다. 바울이 “주 안에 서라”라고 말한 후에 “주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에 기초하지 않은 기쁨은 기쁨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우리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직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는 이 사실에 있다.

 

2) 이 기쁨의 장애물

 

① 기쁨의 기제 자체가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이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 등이 성령의 열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기뻐하라니,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성령의 열매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행동과 연결되는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과 신비하고 금욕적인 관상의 삶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간의 대립은 처음부터 있어 왔다.

 

갈라디아서 5장을 보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라고 말하기 전에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다.(5:16) 한 장에 두 가지 요소가 함께 나오는 것이다. 나는 기쁨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이 내 안에서 지시하고 인도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성령이 기쁨의 열매를 내 삶에 심어 주신다. 둘 다 해야 한다. 진리를 묵상하면서 실천해야 한다. 그럴 때 성령이 우리 삶에 기쁨을 부으신다.

 

②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데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오늘날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공허하고 죽어 있는지 참으로 깨닫지 못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주님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이 점을 완벽하게 짚어 주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3, 6) 심령의 거지가 한없는 영적인 부요함과 풍성함을 누리는 법이다. 그리스도가 없어서 너무나 불행했던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려면 완전한 빈손으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이 아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완전히 가난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반드시 있어야만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손에 무언가 잡고 있으면 주님께 채움을 받을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놓아야 주님의 기쁨을 받을 수 있다.

 

③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을 잃는 이들이 많다. 기쁨을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지켜야 한다. 영혼이 온전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주님의 기쁨을 누릴 수 없다. 성령이 근심하시고 떠나 버리시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른 실천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기는 불가능하다.(마6:24) 성령의 인도를 따르라 그러면 성령의 기쁨이 임할 것이다.

 

④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라는 것이다.

 

⑤ 그리스도와 기도로 교제하며 만남의 끈을 놓치지 말 것을 명령한다.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자기 영혼만 살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아뢰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주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실 수 있다. 기쁨의 근원, 기쁨의 원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꺼이 자주 나아가야 한다.

 

⑥ 상황에 휘둘리지 않음으로써 주님과 만남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많은 일들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그의 임재와 기쁨을 빼앗아 간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쉽게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염려로 주저앉게 만드는지요!

 

3) 기쁨을 지킬 수 있는 방법

 

주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라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묵상하라.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 생각하라. 주님이 장차 하실 일, 인생을 향한 신약성경의 설계와 계획, 최후의 결과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소망을 생각해 보라. 이것이 비결이다.

 

다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은 얼마 가지 않아 말라붙게 되어 있다. 굳이 복음이 없어도 일이 잘 풀리는 동안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놓게 될 날이 온다. 밀려난 후에는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기쁨과 행복을 찾는 사람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올라가기보다 내려가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주 안에 있는 이 기쁨뿐이다. 이 기쁨은 안전하고 확실한 것,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그래서 세상이 손댈 수 없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어떤 세력도 손댈 수 없는 곳에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가진 것을 전부 빼앗겨도 여러분의 영혼과 영원한 운명,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실패하고 죄를 지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다. 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간다. 갈보리 언덕을 찾아, 그가 흘리신 보혈을 찾아, 여전히 나를 씻어 주는 보혈을 찾아 돌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간 자신을 깨끗이 씻어주신 것을 깨닫고 기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 성령이 거하시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쁨을 회복하게 되어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살든지 죽든지 죄를 지었든지 아니든지, 실패했든지 아니든지, 무슨 일이 닥치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출처: 자기부인 / 글쓴이 / 바퀴

 

http://blog.daum.net/dfgiyo/614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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