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죽는 실제 경험, 실제 사례
▲사례1. 여기서 나는 자아죽음에 대한 실제의 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다. 몇 년 전 나는 몇몇 목회자들과 함께 해외세미나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장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십자가와 자아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갔다. 현지에 도착해서 주님은 나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나는 호텔방에서 잠을 설쳐가면서 말씀을 준비했다. 마침 그날 증거 해야 할 말씀도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었다. 아주 열심히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증거 했다. 많은 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인사를 했다. 어떤 분은 '오늘 목사님이 주신 말씀이 전부 저에게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전부 다 받아먹기로 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헌금까지 했다. 그렇게 은혜롭게 말씀을 전한 내가 그날 오후 동료목회자에게 사소한 일로 화를 냈다는 것 아닌가!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것이 나였다. 나에게 상처를 받은 그 목회자는 저녁시간에,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나에게 모욕적인 말로 나에게 보복을 가했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이 복수하고 싶었지만, 함께한 목회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 순간의 분위기상 되받아칠 수가 없었다. 나는 밤새도록 괴로웠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계속해서 괴로웠다. 다만, 괜찮은 것처럼 내색을 안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뿐이었다. 자아죽음에 대해서 설교한 내가,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던 내가 자아죽음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다시 자아죽음의 기회가 온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사역지인)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그 분한 마음과 괴로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쫓아가서 복수할 수도 없는 것이고, 나는 온갖 자아죽음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자아를 죽이려고 몸부림쳤다. 쉽지 않았다. 내가 설교했었고, 그렇게 살라고 말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내가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잘 안 되었다. 우리의 본성이 이렇게 끈질기고 죽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다. 복수를 하던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하는데 둘 다 잘 안되어서 너무 괴로웠다. <갈보리 언덕>의 저자 로이헷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좁은 문을 지나갈 때 단 한 번만 나를 부인하고 부서지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서뜨린 후에도 계속해서 변함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상처를 주면 우리는 즉시 그 멸시가 우리를 보다 더 낮고 겸손하게 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써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이에 반항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마음의 동요를 뻣뻣한 목으로 받아들이든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 라고 말했다. 나는 십자가를 묵상하고, 관련서적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해소는 되는 듯 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었다. 결국은 어느 날 만남의 기회가 왔는데, 나는 자연스러운 것처럼 하면서, 그에게 나의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당신 안에는 독이 있소! 그 독소를 뽑아내지 않고는 당신이 아무리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다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아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고 평정을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뒤틀린 심사는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본성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자아죽음의 은혜의 찬스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다가, 성경적으로 해결하려고도 하는 이중해결책을 사용했었다. 그냥 성경적인 해결책으로 죽어야 했었다. 그냥 그 굴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죽음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죽지 않고 빠져나오려고 했기 때문에 자아죽음의 그 좋은 실제 상황에서 얻은 것은 없었다. 영적축복의 찬스를 놓쳐버린 것이다. 육에 속한 현저한 자아를 죽였어야 했다. 인정사정없이 무차별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어야 했다. 복수하고 싶은 생각, 미워하는 생각,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 두고 보자는 생각, 내가 참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 한마디 꼭 해주자는 생각, 내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시키려고 했던 생각들을 죽였어야 했다. 육에 속한 이런 생각과 감정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어야 했다. 지금 나에게 그런 아쉬움이 있다. 내가 주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찬스였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있으므로 지금도 때는 늦지 않았다. 죽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례2. 또 하나 아쉬움이 남는 지나간 일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본에 처음 왔을 때 나와 함께 사역하던 사역자가 나보다 나이가 10년이나 어렸다. 그러나 그는 나의 상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의 언행에 대해서, 조금은 불만스럽지만 잘 참고 인내하면서 견디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점점 높아지자,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괴로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죽어야할 내 자아가 꿈틀거렸다는 말이다. 내안에 살아있는 독사가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렇다. 내안에는 독사가 있다. 건드리면 확 일어나는 독사가 있다. 그동안 많이 죽였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독사가, 휴화산같이 아직도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 그 당시에는 더 많이 살아있었다. 독사는 우리의 자아를 묘사하는 상징이다. 건드리면 확 쏘는 것이 독사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벌레의 특징은 무엇인가? 밟아도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깨어진 자아를 의미하는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벌레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사는 우리도 벌레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벌레가 아니었다. 벌레인 척한 독사였다. 늘 자아죽음을 말하고 설교했지만 나는 독사였다. 어느 날 젊은 그 사역자가 나에게 명령하는 조로, 내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손님을 맞으러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건방지게 어디 누구에게 그따위로 하느냐하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얼버무리고 밖으로 나온 나는 휴대폰을 걸어서 끓는 심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그가 모욕감을 느낄만한 말을 했다. 속이 좀 시원해지고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내 마음은 더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서 화를 내본 사람이라면 쉽게 공감하리라고 생각한다. 무척 괴로웠다. 그리고 모든 영적능력이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실제적으로 영적 능력이 다 사라졌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어진 물을 주어 담을 수 있는가? 그 앙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은 나는 그와 더 이상 함께 사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그와 어딘가 모르는 벽이 있는 것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하지만, 그 벽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한번 닫힌 마음은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잠18:19)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가끔 아쉬워한다. 그때 조금만 나를 죽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야말로 내가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본성을 거부하고 자아를 죽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고통을 감당해야한다. 이 고통을 사모해야한다. 그러면 은혜는 강물과 같이 당신을 덮을 것이다.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이 주님의 은혜로 덮힐 것이다. 당신의 가정을 덮고, 당신의 교회를 덮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질적인 굴욕이나 무시당함, 괴롭힘을 당함이 자아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위적으로 굴욕과 무시당함을 자처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속에 자연스럽게 이런 기회가 올 때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자아의 죽음을 위해서 기도하면 그 기도의 응답이 상당히 빠르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내가 그걸 경험한다. 그만큼 주님께서 우리의 자아의 죽음을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실질적인 굴욕의 기회는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이다. 실질적인 굴욕의 시간을 잠잠히 주를 바라보면서 죽어지기를 소망할 때, 죽음이 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다. 우리의 자아는 그냥 편안하고 좋을 때는 죽어지지 않는다. 죽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수치를 당한다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 자아는 죽음 앞에 놓여있게 된다. 죽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굴욕을 당하는 찬스가 있으면 당하라, 무시를 당하는 찬스를 놓치지 말라. ▲누군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면, 그 상처야 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잊지말아야한다. 계속적으로 잊지말아야한다. 한번 죽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을수록 죽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화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을 부숴버리라. 그러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이나 행동보다, 당신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죽어졌을 때, 크고 작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어김없이 나에게 찾아온 것은 주님의 은혜와 기름 부으심이었다. 매번 그랬다. 그러나 그 은혜를 지속하지 못했고, 그 은혜가 있을 때 섣불리 만족해 버렸던 것이 그 은혜를 더 누리지 못하게 했었다. 은혜를 받을 때, 능력이 임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계속해서 동일하게 겸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임해도 계속해서 자아 죽이는 일을 중지해서는 안 된다. 은혜가 임할 때 능력이 나타날 때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포하라.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선포하라.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사도바울과 같이 선포하라.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라. ▲사례3. 최근에 나는 한 동료 목사님으로부터 인격적으로 모욕적인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게 된 경위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듣는 순간은 굴욕감으로 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 날부터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엄청 교만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목사님 앞에서 목사님 덕분에 내안에 있는 교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 목사님의 비인격적인 말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그 굴욕적인 말을 사용하신 것이라는 말이다. 정말 교만은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세력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주님 편에 서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에 사로잡히게 된다. 교만은 자아가 펄펄 살아있는 것이고 겸손은 자아의 죽음이다. 교만은 사탄이고, 겸손은 예수님이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교만은 살금살금 알지 못하게 눈치 채지 못하게 들어오는 영의 암적인 존재이다. 나는 굴욕감을 느끼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위험한 지경에 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굴욕감을 느끼게 한 그 목사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물론, 감정적으로 깨끗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목사님의 행동이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그런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영적으로 그런 깨달음이 온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굴욕당한 감정은 있지만, 그 감정 안에 이상한 은혜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꺾으면서 흐르는 은혜의 강물이라고나 할까? 그렇다. 은혜의 강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은혜의 강물이었다. 이 은혜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터 계속적으로 원하는 기도가 ‘나를 더 죽여주시옵소서!’ 이다. 나는 예전에 온누리교회의 하용조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무시당하면 더 좋죠, 모욕당하면 더 좋죠’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래서 그런 설교를 하셨구나 하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다. 이제는 정말로 그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 그런 기회가 인생에 많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정말 놓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했다. ▲독일 다름슈타트의 마리아 수녀회(성공회)의 바실리어 슐링크 여사는 그의 저서 <고난속의 보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굴욕은 교만을 부수는 쇠망치이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절절하게 피부로 느끼고 공감하는 말이다. 우리를 무서운 힘으로 다스리고 있는 교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그 교만을 부수는 비결이 굴욕이라는 것이다. 어느 누가 굴욕 당하는 것을 원하는가? 그러나 원치 않은 굴욕, 무시, 자존심 상함을 놓치지 말라. 고통스럽다고 인간적으로 해결하지 말라. 그 자아를 무지하게 죽여라. 나를 부수고 주님으로 채우는 절호의 찬스이기 때문이다. 성 보나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굴욕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의지적으로 겸손히 낮추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4년 걸리는 겸손의 과정을 4개월 만에 도달할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생활 속에서 창피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는 일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이 그토록 사모하던 은혜와 축복,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와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 말이다 ▲사실, 삶 가운데 창피를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굴욕을 당하는 일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쉽게 넘겨버릴 수 있는 일도,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고 굴욕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좀 예민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은, 인간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자아의 그 죄성이 많이 드러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좀 덜 민감하게 보이고, 어떤 사람은 자아의 죄성이 더 많이 드러나서, 더 민감하게 보일뿐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인간의 내면은 당연히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죄성이 많이 들어난 민감한 사람은 어떤 면에서 보면 드러난 자아를 부인하고, 죽일 수 있는 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아의 죽음을 위해서 부단히 기도하고, 자아를 완전히 죽여 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셔서, 요즘은 지난날의 상처라든가, 기분이 나쁘게 생각했던, 그러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면의 상처들을 드러나게 해주신다. 정말 감사할 일이다. 나의 기도의 응답이다. 자아의 죽음을 좋아하시는 주님은, 내 자아죽음에 대한 기도는, 굉장히 빠르게 응답해 주신다. 한번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요즘, 굴욕이나 무시를 사모한다. 그 굴욕이 자아를 부수는 엄청난 파워가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자아죽음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사도 바울만큼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신이 가진 장점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아의 죽음을 자랑했다. 자아죽음이 엄청난 보배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자아의 죽음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당하는 굴욕이나 무시를 생각하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정말 자아의 죽음을 사모하기 때문에, 자아의 죽음을 돕는 굴욕감이나 무시당함을 사모하고 있다. 그런 중에 깨달은 사실이, 굳이 실제적인 굴욕이나 무시가 없더라도,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상처가 하나둘씩 드러나는 것도 자아죽음의 좋은 역할을 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사례4. 잠재되어있는 과거의 숨은 상처를 자아죽음의 기회로 선용하는 것이다. 나의 기도의 응답으로, 아주 오래전에 나의 내면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드러나고 있다. 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면, 애써서 다른 생각을 하던지, 아니면 기도하면서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곤 했다. 이것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쾌한 생각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떠오를 때, 그때의 장면이나 그 사람의 손짓, 표정, 말을 생각할 때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지고, 아픈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당시의 괴로움, 무시당함, 굴욕감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주님 앞에서 부숴버리고 있다. 상처 입은 자아를 달래주지 말고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것이다. 그 효과가 아주 좋다. 실질적인 굴욕감이나 무시당함 이상으로 아주 효과가 크다. 모든 분들에게도 자신 있게 권면하고 싶다. 숨어있는 상처, 굴욕감, 괴로움을 드러내시라. 그리고 하나님의 수술대로 올라가라. 올라가서 내려오지 말고 수술하고 잘라내 버리시라. 그 자아를 꺾어버리라. 놀라운 영적 유익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믿는 사람은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되고,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누가 받는 것인가? 바로 죽임의 대상이 되는 자아 아닌가? 자아가 죽은 사람은 상처받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진정으로 자아가 죽은 사람은 절대로,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처받지 않는다고 말이다. 상처가 되고, 상처를 받는 만큼, 그 사람의 자아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이 말을 잊지 말고 자신의 자아에 적용해 보라. 누군가의 말에 의해서, 누군가의 행동의 의해서 상처가 된다면, 그것은 죽어야할 자아라는 것을 말이다. 자아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보배로운 것을 얻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자기목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 자아를 말하는 것이다. 자기자아가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자아가 죽으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영적인 모든 좋은 것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영적축복을 더 깊이 누리기위해서 자아가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그리고 날마다 순간순간 나는 죽었다고 선포하라. 선언하라. 여기라.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순간순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선포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적인 죽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주님은 자아가 죽은 사람을 들어서 일본선교의 도구로 분명히 사용하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내가 죽은 만큼 성도들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내가 죽은 만큼 교회 안에, 성도들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을 경험한다. 그래서 죽음을 더 사모하고 더 사모하고 놓칠까봐서 노심초사한다. 나는 예전에 찬양사역을 할 때에 그런 경험을 많이 했다. 그 시절은 기도와 회개 그리고 나의 자아를 깨트리려고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언젠가 찬양을 인도하는데, 집회장소가 구름이 낀 것처럼 무언가로 인해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이 장소 안에 무언가가 운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한다. ▲이 임재를 단 한번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사역 안에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름지고 좋겠는가? 이런 임재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은 변한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냥 그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임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 임재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기적은 평범한 것이다. 이유 없는, 왠지 모르는 기쁨과 눈물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냥 마냥 좋아지는 것이 이안에 있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 5:14)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예배,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사역의 출발은.. 자아의 죽음이다. 지속적인 자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죽음이 이렇게 좋은 것인데, 그런데 이 죽음이 고통을 동반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솔직히 싫어한다.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사모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에 실패하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많이 실패하고는 안 된다고 말하고 포기해 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안 되지 않는다. 된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 야마토 은혜교회 천창길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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