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자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

 

 

오전 집회가 마무리되면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틈을 타서 난 옆 형제에게 이곳 주임형제님에게 인사라도 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청했다. 그런 사이 언제 다가섰는지 가까이서 계시던 어느 노인 한 분이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제가 이곳 주임입니다” 하며 다가섰다. 나는 허리를 굽히며 그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분 같았다. 나는 이분을 어디서 보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기억을 찾으려 애썼다. 어디선가 뵈온 낯익은 얼굴이었다. 머릿속에는 내가 자주 다니던 학교 앞이나 아니면 시장 어딘가에서 장사를 하는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선가 기억은 없지만 많이 본 얼굴이었다. 잠시 동안 머뭇거리던 나는 머리를 강하게 한 대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과 함께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부끄러움이 얼굴을 발갛게 달구었다. 시장통이나 학교 앞에서 보던 분이 아니었다. 내가 교회당에 들어올 때 입구에서 신발을 닦던 분이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노인이 무엇을 못하면 여기서 신발이나 닦으면서 먹고살고 있을까라고 불쌍히 생각했던 바로 그분이었다. 그분은 이 집회소에서 가장 오래된 85살의 주임형제였다. 성경 말씀 그대로 성도들을 몸으로 섬기는 종이었다. 나중에도 같이 생활하면서 보아왔지만 그분이 집회에서 입을 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집회소 곳곳의 보이지 않는 곳을 쓸고 닦으며 봉사하고 섬기는 그야말로 주님의 그림자였다. 과거 교회생활을, 왕같이 군림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온 탓에 이는 나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들어왔다. 구차한 살림으로 해어지고 허름한 옷을 입었지만 그분의 모습은 주님이셨다. 그날 난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분은 주님이었다.

 

그분 안으로 주님이 가득 차고 넘쳐흐르는 주님을 표현해 내는 하나님 사람이었다. 자리에 앉아있기만 해도 그리스도가 표현되는 주님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거나 지도한다는 인상을 거의 받을 수 없으나 저만치 앞서가는 주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도 그 유명하다는 사람과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 보았지만 그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된 것이라고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교활하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지극히 천연적인 사람 그대로이다. 이러한 분을 만나게 한 것은 나의 신앙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님의 긍휼이고 은혜였다.

 

한 번은 주임형제가 하는 일이 무엇이며 사역을 담당하는 분들의 자격 조건 같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주임형제가 어떻게 될 수 있는가가 궁금하였다. 내가 아는 지식으로는 목회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신학교를 나와야 한다. 그리고도 성경 지식이 출중하거나 그러한 사람이어야 한다. 신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목사 자격증을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교회 안에 신학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는지 궁금하였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나로 소름이 끼치게 하였다. 노형제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형제님. 저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 있었지만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 외에 사람이 가르치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교회 초기에 사람이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오직 주님만이 가르칠 수 있습니다.”

 

“.............”

 

“주님께서 가르치라고 말씀하시기 전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집회소에서 어느 누구도 주님의 허락 없이 사람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는데요?”

 

“주님께서는 전도의 방법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사신 그대로 우리 또한 주님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3-4장을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

 

“형제님, 마태복음 3장입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4장에는 성령이 주님 위에 내린 후 주님께서는 곧바로 마귀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간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나요. 시험을 마치고 마귀가 물러가자 천사가 와서 수종 들었습니다. 그 후 삼 년 반 동안 주님의 사역이 시작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은 물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한 시험입니다.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어떤 과정을 거치셨는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사역하는 이는 누구나 이와 같은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통과한 자가 아니면 사역할 수 없습니다. 사역자로서 주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스스로 사역하는 자는 주님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사역의 명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어느 누구도 사역할 수 없습니다. 남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 배역의 도를 갔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섬뜩하였다. 사람은 무엇인가 아는 것이 있으면 가르치려고 한다. 사람에게 타고난 본성이다. 내가 그렇다. 난 무엇을 조금 알면 가만있지를 못했다. 누구에게라도 가르치고 싶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경을 조금 알고 나서 얼마나 아는 체를 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는 본성이다. 가슴에 띠를 두르고 길거리에서 외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은 것이 인간이다.

 

“어떤 시험을 통과해야 하지요?”

 

“주님에 대한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돌들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들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것들로 네 밥벌이를 삼으라고 합니다. ‘교회를 하나 세워 이것들로 네 밥(떡)을 만들어 봐’라고 속삭입니다. 사악한 사역자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자기 교회를 세워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단으로 삼고자 합니다. 사단(돈)은 너는 내가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전도자들이,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먹는 문제에서 넘어집니다. 돈에 약한 사람들이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돈에 넘어진 사람에게 그의 말씀을 맡기시지는 않습니다. 과거 2천 년의 사역의 역사 가운데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말씀을 맡긴 일은 없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했고 스스로 먹는 문제를 이긴 자들이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역자의 말로는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지만 사역자의 옷을 뒤집어쓴 사단입니다.”

 

 

세상에는 사악한 자칭 사역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들은 하나님을 핑계로 성도들을 늑탈하는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다. 내가 있었던 교회도 그랬다. 이름은 교회라고 하지만 성도들을 자신들의 떡으로 삼았다. 주님께서 주신 첫 번째 시험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주님께서 보내신 일이 없는 자들이었다. 누가 그랬다. 사악한 사역자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은 성도들은 먹을 것과 머물 곳이 없는데 약탈한 재물로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도리어 큰소리치고 사는 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불쌍한 성도들은 약탈자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이미 사단의 밥이 되어 분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란다. 정신분석가들은 언젠가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자기들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다는 것이다. 막상 갈 곳도 없고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종살이를 하다가 인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두 번째 시험을 받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여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 자신 성전 된 몸으로 높은 곳에 매달려 죽기로 하고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높이 달려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시험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사역자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 성전 꼭대기로 올라간 자들입니다. 죽은 일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높임 받기를 좋아는 자들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앉아 제 손으로는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입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파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모든 비밀을 안다고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높은 지식으로 밤낮을 새우는, 지식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교인(돌) 하나를 얻기 위하여 부지런히 돌아다니지만 하나도 얻지 못합니다.”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살려고 왔다. 입으로는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것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죽은 경험이 없는 자요 펄펄 산 자이다. 지극히 천연적인, 변화 없는 자들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린 자들이다. 때문에 오늘도 주님께서는 성전 안에 계시지 못하고 교회 밖 높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악한 사역자들이 성경을 아는 지식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주장하고 명령하는지 모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저들을 따르는 분별력 없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할만한 재료(돌)는 얻지 못한다. 사악한 사역자들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돈(하루살이, 짚이나 나무)을 얻을 수는 있으나 주님이 거하실 성전을 건축할 신실한 돌과 반석은 구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러한 집에 거처를 정하시겠는가?

 

 

“두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세 번째 시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영광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들은 섬김을 받고 사람들로 영광을 받으려 합니다. 시장 어귀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자리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입으로는 종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자리에 앉은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형제님. 이 세 가지의 시험을 통과한 자가 아니면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 시험을 통과하셨고 그리고 곧바로 천사의 수종을 받았습니다. 삼 년 반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섬김을 받으려 하고 세상 영광을 받으려 하는지. 사역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가는 길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떡을 위하여 사역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온 땅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생기면 배나 더 지옥 자식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은 아니다. 사단으로부터 온 자이다. 그러한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곧 사단의 말을 듣는 것이며 곧 사단이 되는 것이다. 노형제님은, 주님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이러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선택하는데 이러한 세 가지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보면 그가 주님의 시험에 통과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주님은 결코 그의 비밀과 계시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도 그랬다. 그는 사람들이 오신 예수라고 했다.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하나님 자리에 앉았다. 혼자 결정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지도자라고 하였다. 종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보다 그의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했다. 그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군림하였고 그의 눈 밖에 나는 사람들은 하수인들에 의해 내쫓김 당했다. 성도들을 늑탈하는 이리보다 강한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돌들이 떡이 되게 하였다. 주여. 당신이 보내지 않은 자들이 어찌 이런 일을 할까요. 멸망이 가까운 때 많은 자들이 일어나 내가 예수라 하는 바로 그런 자들이리이까? 사역의 길이 무엇인가 알게 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은 우리에게 떡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주의 전을 건축할 돌이 되게 하려 오셨다. 생명을 주러 오셨다. 하나님 나라의 건축재료들을 얻으시러 오셨다. 그분은 낮은 곳에 임하셨다. 주님은 이 세상 임금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죽으러 오셨다. 종의 몸으로 섬기러 오셨다. 겸손과 온유로 행하셨다. 주님이 받으신 시험은 종의 모습으로 와서 다른 이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 생명을 분배하러 오신 것에 대한 시험이었다. 이것이 주님의 시험이었고 주님이 가신 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우리 또한 주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하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가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주님의 길을 찾을 수 없다. 주님의 길이 어떤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길이 이런 길이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그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이다.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신학교 졸업했다고 가는 길은 아니다. 최소한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에 머리가 끄덕여졌다.

 

중국에서는 주임형제라고 모두 말씀을 전하지는 않는다. 주님과 같은 길을 걷는 분들이 아니면 감히 나서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주임형제가 되는가를 묻고 싶었다. 이 궁금증은 주님께서 나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노형제님은 나의 다음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형제님. 주임형제는 어떻게 될 수 있나요? 신학교를 나와야 하나요. 아니면..... 주임형제의 임기는 얼마나 되는지? 본인이 사퇴할 때까지 얼마든지 할 수 있는지요?”

 

“형제님. 금년 제 나이가 85입니다. 이젠 쉴 때가 되었는데 주님이 허락하시지 않으시니.."

 

“왜요. 다른 분께 맡기시고 은퇴하여 쉬시면 되실 터인데........”

 

“우리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신학교는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분 스스로가 선택하셨습니다. 내가 그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자원하여 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직접 그분 자신의 일을 수행할 신실한 그분의 종을 뽑는 것을 봅니다. 주임은 말 그대로 주(主)께서 그분의 일을 직접 맡기(任)십니다. 그래서 주임(主任)이라고 합니다.”

 

 

 

직접 그의 종을 선택하시는 주님

 

 

주님께서 그의 제자를 주님 자신이 직접 선택하셨다는 말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으로 들어왔다. 우리 또한 내가 원하여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주님이 직접 선택하시고 부르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으며 구원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는 데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시기에 적합한 사람을 부르신다는 것이다. 구원은 값없는 은혜라고 할 수 있지만 부르심에는 조건이 있다. 군사로 부르신다면 군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시고, 왕으로 부르신다면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신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하고 당연한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그분은 목적이 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필요가 있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을 친히 부르신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것과 상반된 것으로 참으로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원하는 마음, 그것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사람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그분 스스로가 부르시지 않는다면 많은 경우, 어쩌면 거의 전부가 잘못될 수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르심이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에 갔다고 하자. 수년씩 하나님의 종이 되겠노라고 기도한 사람들이 전망이 없고 교단이 너무 좁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우왕좌왕하더니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년씩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왔다는 사람들이 전망과 형편은 왜 보는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뜻과 목표가 있고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즉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간들 하나님의 일을 하겠는가!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일에 대단한 열심과 정성을 쏟는 것 같을지라도 그 속에는 자신의 뜻과 생각과 야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징병하는 분이시다. 세상 일은 자원병일수록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자원병이 필요치 않고 하나님 자신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절대적으로 그분 스스로에게서 시작되고 절대적으로 그분의 필요를 위해서만 시작된다. 구약의 사사들이나 선지자들도 그렇거니와 주 예수님의 사도들 중 그 누구도 자원병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그분의 선택에 따라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과 그의 나라에 있어서 사람의 소원을 따르지 않으셨고 오직 스스로 시작하셨다. 이 땅에서 목회를 한다는 분들의 어느 정도가 주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것인지? 스스로 목사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간 것은 아닌지? 생각하니 더욱 궁금하였다.

 

“주님이 어떻게 직접 뽑는데요?”

 

“주임의 임기는 1년입니다. 연말이 되면 연초 첫 주일 되는 주간에 교회 전체가 기도 가운데 들어갑니다. 나도 기도 가운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몸이 쇠했고 주님의 일을 하는데 이미 너무 늙어 힘들고 움직이기도 힘드니 주여, 보다 젊고 신실한 형제로 하여 일을 담당케 하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직 네가 할 일이 남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을 어길 수 없어 일어서는 것입니다.”

 

한 번 목회자는 평생 목회자이다. 내가 아는 목회자라는 직업은 평생직이다. 죽어서 나오는 자리이다. 중국 형제들은 주임형제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봉사의 일을 1년으로 한다고 한다. 어두움 가운데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이들 형제님들 가운데 어두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보다 더 나를 매혹시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대표를 뽑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엎드려 오직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 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어떠함에 의존하기 보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그들의 믿음이다. 주님께서 직접 그들의 인도자를 믿음으로 선택하여 주시기를 부탁하며 나아가는 것이다.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을 세우심에 대한 얘기를 하셨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다고 할지라도 그가 범죄함으로 그의 홀을 다윗에게 넘기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특히 사역자가 범죄하면 다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그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세우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즉시 그의 말씀을 다른 곳으로 옮기신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울이 정상적이지 않듯이 버림받은 사역자 역시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과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타락으로 몰아넣기 쉽다고 한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교회의 비극이고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역자는 사울과 같이 자기를 대신할 기름 부은 자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낸다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처럼. 그로 인한 교회의 혼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무엇보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한 인사를 주님께 맡기는 모습이다.

 

봉사의 일을 1년으로 한다는 것은 한편 그것이 형제에게 지우는 짐이기 때문일 수 있다. 너무 큰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개인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봉사의 일이다. 세상의 이익과 명예와 거리가 먼 종의 위치이다. 한국교회는 목사 자리도 세습한다고 들었다. 결코 남에게 줄 수 없는 세상의 이익과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라면 세습함이 마땅하다. 여기가 세상 아닌가. 주님의 3년 반의 사역도 눈물과 고통과 질고였다.

주여, 주님이 가는 길을 우리도 갈 수 있게 하소서. 아멘.

 

 

 

그분의 종의 표준을 보여주신 주님

 

 

새해 첫 주일 날 형제자매들이 모여 예배가 시작되면 깊은 기도 가운데 말하는 이 하나가 일어나 '금년 주님께로부터 일을 받으신 주임 형제님 일어서세요'라고 한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3-5명의 형제들이 일어난다고 한다. 일어서시는 분이 없으면 다음 주일로 미루어진다. 그러나 주님은 반드시 그의 신실한 종으로 일할 사람을 정확히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교회 안의 주님의 부담이 클 때는 6-7명의 형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면면이 너무 신실한 조금도 주님의 종으로서 직임을 다하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나이도 적당히 40대, 50대, 60대. 이렇게 고루 직분을 다하는데 필요한 주의 종을 선택해 낸다고 한다. 나의 궁금증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는 장로 하나 뽑는데도 엄청난 돈을 들이는 판에 하나님이 점지했는지 안 했는지 누가 알 것인가? 하고 싶은 사람이 많은데 살짜기 일어나면 어떨 것인가 싶은 궁금증 말이다.

 

“형제님. 어느 사람 치고 나서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높은 자리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사람이 있어 일어나라고 할 때 살짜기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요?”

 

“형제들의 영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그 형제의 눈을 통하여 저를 감찰하는 분을 봅니다. 저는 형제들의 영 안에 있는 주님을 읽습니다. 때문에 형제들의 영 가운데 있는 주님을 만질 때 그 형제의 눈에 비치는 주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모릅니다. 불과 같이 타는 주님의 눈을 봅니다. 결코 어느 누구도 주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성장한 교회의 참 모습이다. 거짓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형제 하나하나를 주께 대하듯 조심스럽게 섬기는 모습이 그렇다. 우리는 성도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불같은 눈을 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들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성도들을 속일 수 있다. 그것은 성도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주님이 직접 선택한 사람이 그의 형제 된 자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주님께서 직접 택하셨다면 진정 사도라 할 수 있는 위치이다. 그것은 곧 주님 자신이 섬기는 것이다.

 

신학교를 나왔다고 목회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주님과 관계 없는 극히 인위적인 것일지 모른다.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다. 어떤 자들은 목사직을 돈으로 사거나 지위를 얻고자 성도들의 표를 사는데 적지 않은 돈을 뿌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인간이 세우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은 아니다. 중국 교회의 주임 형제님들은 하나하나가 주님의 모습이었다. 종의 모습일 뿐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생명을 분배하는 사도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주임 형제들에 대한 급여나 생활에 대한 보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봉사하는 양으로 형제들의 소용대로 필요로 하는 양육의 봉사를 성심으로 할 뿐이라는 것이다. 주임형제라고 하여 특별히 다른 형제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심부름하는 사람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집회소 안에 과연 이끄는 자가 있는지 눈에 뜨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앉아서, 때로는 필요한 일에 눈에 뜨이지 않게 봉사의 직분을 수행한다. 말씀으로 양육하고, 몸으로 실행하는 양 무리의 앞서가는 수양과 같은 모습이다. 양 무리의 앞서가는 수양 이상이었다.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당당한 모습으로 무리 앞에 선 수양의 모습 그 이상이다. 마치 지팡이를 들고 앞서가는 출애굽 당시 모세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보내심을 받은 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알려주신 주님께 감사가 터졌다. 저절로 마음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오는 신실한 종의 모습이었다.

 

 

형제님은 하나님이 보낸 자가 가지는 태도에 대해 모세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당신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이다. 곧 하나님께서 보낸 자는 이런 표적을 보일 수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출4:1-4)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 하여 던진즉 뱀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지팡이가 있다. 자기의 지식이 자신을 지탱하는 지팡이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자신의 기술과 경험이 자신이 의지하는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돈이, 지위가, 학력이 지팡이가 될 수 있다. 마귀는 이와 같이 우리가 의지하고 지탱하는 곳에 둥지를 틀고 산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하는 것을 던진즉 뱀이 된 것과 같이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라 하지 않고 그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도록 던지라 했다. 말씀이 뱀의 탈을 벗긴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의지하는 지팡이의 속성을 알고 나자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그가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 사단 마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어떻게 했는가? 주님은 뱀의 꼬리를 잡으라 하셨다. 우리는 뱀의 꼬리를 잡아야 한다. 꼬리를 잡으면 뱀은 꼼짝도 못 한다. 뱀은 창세기 3장 이후 꼬리를 감추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뱀의 꼬리, 그것은 뱀의 특성인 허위이며 거짓이다. 우리는 거짓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거짓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꼬리를 붙잡은즉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그 지팡이는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인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의지하고 지탱하는 것의 꼬리를 붙잡아야 한다. 주님이 사역자는 무엇보다 거짓을 처리해야 한다. 그랬을 때 그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의존해 왔던 것들이 권위의 지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의 학식이 하나님의 권위를 위해 사용되어진 것처럼 그렇다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는 무엇보다 자신이 의지하는 그 무엇이 사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사단의 감추인 꼬리, 즉 거짓을 드러내고 처리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출4:6-8)

 

 

두 번째는 품에 품은 손을 내 보라 한즉 그 손이 하얗게 문둥병이 든 것을 보았다. 내 안에는 문둥병으로 하얗게 센 더러움이 가득하다. 우리는 문둥병자 들이다. 죄를 짓고도 가책이 없는, 감각을 잃어버린 더러운 문둥병자들이다. 우리는 누구를 탓할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형편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멸망 받을 인생들이다. 우리 안에는 멸망 받을 죄로 가득하다. 우리에게 깨끗한 것이 없다. 그러나 말씀에 의존하여 다시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본즉 깨끗하였다. 우리는 사형에 처해야 마땅한 자들이며 주님의 새 생명이 아니면 깨끗함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출4:9)

 

세 번째는 애굽의 하수를 취하여 육지에 부은즉 피가 되었다. 애굽의 풍요로움은 나일강의 하수로부터 왔다. 나일강의 하수가 피로 변하는 것은 이 세상 부요의 모든 바탕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보여주신 이 세 가지 사실을 삶으로 사는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의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의지하고 지탱하는 것이 곧 사단이요, 자신은 더러운 문둥병자이며, 오늘날 자신을 만들어 준 모든 공급이 곧 사망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옷 입은 자가 주님이 보내신 사역자이며 권위의 표상이라는 말씀이셨다. 세상을 끝낸 사람들이다. 세상에 터를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다.

 

형제님들의 모습은 권세와 돈과는 너무 멀었다. 가난하나 부요한 자 같았고 비천한 모습이나 귀한 자와 같았다. 인간의 모습과 같았으나 하나님과 같이 희고 밝았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단지 감사할 뿐이었다. 주여 저도 그런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아멘.

 

점심을 마치고 오후 집회에 들어갔다. 기도가 있고 처음 온 이방인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그리고 근간 구원받은 형제들에 대한 소개와 안내가 이어졌다. 당연히 간증을 해보라는 무언의 압력이 내게 오는 것을 느낀다. 일어서 간증을 했다. 늘 하는 간증이지만 떨림이 있는 그러면서도 북받치는 감격이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간 나의 간증은 형제들 앞이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해왔다. 그러나 여기서의 간증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임재 가운데 영으로 말한다는 강렬한 느낌이 감동으로 엮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나의 서투른 중국어 간증이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어주며 같이 즐거워하고 화답하는 중국인 형제들의 모습에서 진한 형제 사랑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하고 화답하는 모습이 혼자 간증하고 있다는 느낌보다 내 안에서 강한 뜨거움이 일어서 말해내고 있었고 그것을 함께 누리는 단체적인 호흡과 같은 인상을 받았다. 간증하는 동안 같이하는 모든 무리가 주의 영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간증이 끝났을 때 여기저기 할머니며 할아버지 형제들, 청년 형제들이 일어서 나를 꼭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한 형제 사랑이 피부를 타고 가슴 가득히 몰려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같은 피로 주님과 함께 형제가 되었다는 찬송이 절로 터지게 하였다.

 

 

 

간증으로 중국교회를 만나게 하신 주님

 

 

이 날 나의 간증은 중국에 와서 두 번째 하는 것이었다. 이 간증이 없었다면 이 모임에 들어올 수도 없었다. 내가 처음 사이판의 어떤 형제로부터 중국으로 돌아가는 중국인 자매를 한번 찾아보라는 전화를 받은 것은 상당 전이었다. 우리와 같이 확실히 구원을 받은 분이 있는데 중국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중국에 그런 무리가 있을 것으로 보이니 한번 꼭 찾아보라는 얘기였다. 어렵게 그분을 찾았지만 그분이 알려주는 하얼빈 집회소의 형제와 연결하는 데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를 했건만 잘못 찾았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포기가 되지 않았다.

 

틀림없이 옆집 근처 어디라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자기 일이 아니면 알아도 모른다고 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 치하의 중국 땅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들의 위치를 밝힐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다. 다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는 분이 여전히 같은 남자지만 내가 그분을 찾는 이유를 먼저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먼저 나는 한국에서 온 사람인데 어디 어디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혹시 내 중국어가 좀 이상하지 않느냐 물으니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한 것 같다며 전과 다르게 호기심을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한국교회에서 구원을 받았고 그간 한국교회 안에서 오랜 세월 동안 생활해 왔으며 근간에 중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주의 형제들과 떨어져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간단히 얘기하고 사이판에서 만난 어느 분의 소개가 있어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라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대뜸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경험이 있으면 간증을 해볼 수 있느냐 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주님의 긍휼인지 모른다. 참 교회의 모습을 내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게 한 주님의 안배에 감사할 뿐이다. 오래 잘 기다렸다는 생각과 함께 구원받은 간증을 했다. 30여 분이나 했을 것이다. 내 간증을 끝까지 듣던 그 형제는 “당신은 진정 내 형제요.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하지 않은가.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다. 먼 이국땅에서 주님의 피를 함께 나눈 형제를 만날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수십 번이나 했다.

 

이윽고 그 형제는 “그럼 한국 형제님 제 간증을 들어 보세요”한다. 어쩌면 그렇게도 우리가 늘상 하던 간증과 같은지 새삼 놀라웠다. 사회 상황과 환경이 다를 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았고 그리고 주님의 보혈로 자신의 그 많은 죄가 눈처럼 하얗게 씻기어졌다는 간증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주 안에서 주의 새 생명으로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간증과 대화가 인연이 되어 내가 중국 교회에 안내되어 들어왔던 것이다. 나의 분명한 간증이 없었다면 내가 중국 교회에서 주님을 보았다는 말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국의 지하교회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이 있었다. 많은 형제들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만으로 붙잡혀가고 극심한 노동형에 시달리는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때문에 확실한 사람이 아니면 접근이 어려운 곳이었다.

 

내 간증이 끝나고 최근 구원받은 몇 형제와 자매들의 간증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내가 한국 교회 안에서 듣던 간증과 거의 차이가 없다. 물론 배경과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동기와 각 개인의 환경은 크게 다르지만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발견하고 말씀으로 그 죄를 씻음 받았다는 내용까지는 거의 대동소이하였다. 하나님은 중국이나 어디나 다 같은 하나님이셨다. 이어서 중국인 형제들의 답을 겸한 간단한 간증이 있었다. 간증과 찬송시가 이어지고 찬송가와 화답이 오가는 모습은 천국이었고 잔치마당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간증과는 좀 더 다른 확실한 진전이 있는 느낌이 강하였다. 우리와 같이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주님의 새로운 생명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말로 간증을 맺는 것이었다.

 

간증들이 마무리될 즈음에 나이 든 형제님들 몇이서 계속 일어나 입을 열어 성경 말씀을 여셨다. 새롭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신 형제들을 환영한다는 내용이지만 핵심은 죄사함 받은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권고였다.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정결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들 그릇들을 깨끗이 하였다면 버리기 위해 깨끗이 하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담으려 하지 않았겠느냐는 말씀도 있었다. 더러운 병을 씻어 깨끗한 병이 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씀이었다. 빈 병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약병이 될 수 있고 독약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담기 위해 창조된 그릇들로서 주님을 담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성전으로 조성되고 변화되는 삶의 중요성을 얘기하셨다. 어느 형제는 죄 사함 받은 것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에 불과하며 앞으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정이 남아있는가를 말씀하시며 마지막 주님의 성전을 이루는 데까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과 은혜를 말씀해 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구원 간증에 만족하고 구원만을 중요시하는 교회는 어린 교회라는 것을 알았다. 1930년대 중국 교회들 가운데 구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면서 집회가 온통 구원 간증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일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큰 핍박으로 흩어지게 하면서 삶과 실제 가운데 주님을 간증하게 하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선지 집회 가운데 간증은 가나안을 누리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에 들어가 주님이신 가나안 땅을 누리는 간증이 주제가 되며 가나안(영) 안의 삶 가운데 수많은 대적(여러 가지 모습으로 오는 自我: 육과 혼의 처리)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해 나갔는가가 간증의 주종이었다. 날마다 어떻게 죄 사함을 받았는지 구원 간증을 나누는 우리와 판이하다.

 

중국 교회에서 간증은 신중하면서 차분하다. 우리처럼 열기가 있거나 들뜬 기분이 없다. 집회소에서 처음 구원받고 나오신 분들의 간증은 자유롭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쁨과 찬송, 반가움이 넘친다. 그러나 간증 후 나이 드신 형제님들의 권면의 말씀들은 예사롭지 않다. 구원 간증을 비교적 간단히 하게 할 뿐만 아니라 크게 벌리지도 않는다. 중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뼈아픈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중국에서 194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원 간증이 집회의 중심이었다. 모이면 구원 간증이었다. 하루에 수백 명씩 새로운 영혼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면서 중국 교회의 대부흥기가 있었다. 집회는 구원받는 열기로 가득했고 어두운 중국 사회를 크게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원받는 집회는 더 많은 사람을 구원받게 하기 위한 집회를 조장해 나갔다. 구원 전도가 교회의 사업이 되었다. 구원받기 위한 집회와 설교가 준비되었고 이를 위한 돈, 조직, 사람이 뒤따랐다. 구원 간증이 판을 쳤고 교회는 여기에 몰두하였다. 인기 있는 설교자가 등장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구원 받은 무리(파벌)가 생겼다. 인간적인 열심과 조직, 수단이 교회 가운데 들어왔다. 교회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으로 인수가 증가하면서 더 조직화되고 규모화 되면서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집회를 위한 집회소의 건축과 이를 핑계로 한 헌금과 이를 유용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생기면서 중국 교회의 전성기가 끝났다는 것이다. 한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 단계에서 끝났으며 더 전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산당을 불러 중국 교회를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하셨다. 중국의 몇몇 형제들의 이야기는 중국 교회가 당시 그렇지 않았으면 중국이 공산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초기 예루살렘교회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핍박으로 흩어지게 했던 것과 같다는 것이다. 중국 교회 또한 공산당의 핍박으로 말씀이 지하로 내려갔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으로 오늘날 성숙한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말씀이 전 중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사람은 실패했지만 주님은 결코 실패하실 수 없으셨다. 주님은 공산치하의 엄혹한 환경 가운데 그분의 자녀를 두시고 더 정결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단장하시는 역사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중국 형제들은 구원 간증에 머무는 교회를 어린아이 교회라고 말한다.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만큼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 교회가 구원에 매달리게 되면 교회 또한 어린아이를 기르는 집의 분위기를 벗지 못한다는 것이다. 메시지의 내용이 어린아이를 위한 음식이 주종을 이루기 때문이다. 성장에 따라 여문 음식으로 먹이는 양육과 성숙함으로 생명을 건축하는 역사가 고루 나타나는 것이 정상이다. 교회가 오직 구원밖에 모른다면 교회는 젖을 먹이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사실 구원받은 사람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어린아이는 분별력이 없고 사단의 꼬임에 빠지기 쉽다. 분별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사단에게 속기 쉬운 것이다. 사악한 무리가 들어와 성도들을 늑탈하는 시기는 바로 이런 시기의 교회들이다. 어린아이가 열심과 순수함은 있으나 속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와 같은 열심은 있지만 성숙한 교회가 되기는 어렵다. 양과 이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늑대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어도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 교회사에서도 구원의 역사가 불붙듯 일어난 교회들이 가장 먼저 사단의 공격을 받고 타락한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는 느낌이 든다.

 

중국 교회의 집회는 풍성한 말씀으로 넘친다. 말씀 전하는 이가 따로 없다. 모두가 듣는 자며 말하는 자이다. 성숙한 형제들이 있다. 집회는 기도와 찬송과 넘치는 말씀들이 열린다. 기도도 찬송도, 찬송시도 말씀들도 모든 사람이 입을 열어 같이 한다. 모두가 주님과 연합된 몸으로 건축되어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모두 하나같이 같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입을 여는 대로 주님이 표현되고 나타난다.

 

내게 이런 교회를 보여주시다니! 주여! 당신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음을 간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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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교회의 첫 방문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에 익숙했던 탓인지 모르지만

같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어렵게 만난 중국인 형제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중국 지하교회로 들어서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중국 교회의 첫 방문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오랫동안 한국 교회에 익숙했던 탓인지 모르지만 같은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다녔고 보았던 교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교회라고 생각했던 곳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에 들어온 첫해 늦여름 어느 날이었다. 어렵게 만난 중국인 형제의 뒤를 따라 처음으로 하얼빈 교외의 한 가정교회(聚會所, 일명 지하교회라고 부른다)로 들어서던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곳은 내가 교회라고 생각해 왔던 관념들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늘 주님을 만났다고 소리를 질렀을 정도이다.

자그마한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한 노인이 흙으로 뒤범벅이 된 신발을 닦고 있었다. 또 한편에는 물에 닦은 신발을 그늘에 말리고 있었다. 초라한 형색에 하얗게 센 머리, 골이 깊게 패인 얼굴을 보면 80 중반은 훨씬 넘었음직하였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걸레를 빨아 신발에 묻은 흙과 먼지를 닦고 있었다. 밖에 흙이 소복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신발의 묻은 흙을 털어 내고 걸레로 닦는 것 같았다.

 

중국에는 포장 길이 많지 않다. 내가 살던 흑룡강성은 한 번 비가 내리면 바지 가랑이며 신발이 말이 아니었다. 흙 입자가 미세하여 작은 비에도 팥죽을 쑨 것 같이 질퍽하여 신발 밑에 흙이 잔뜩 달라붙었다. 전날 비가 내린 탓이기도 했지만 그곳 입구로 들어가는 길은 유달리 심하였다. 신발을 닦고 있는 노인을 보는 순간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노인 양반이 무엇을 못하면 여기서 신발이나 닦으며 먹고사는 것일까? 자식들은 없을까? 안타깝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노인을 보고 나는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당시의 나의 어떠함이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의 경험이었고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지식이었다. 나는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았다. 그런 세상을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발만 열심히 닦고 있었다.

 

 

 

집회소에서 나타난 주님

 

 

교회 안에는 60-70명이 넘을듯한 사람들이 긴 탁자 4개를 사각형으로 맞붙여 놓은 것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마침 어느 젊은 여자 분 하나가 일어나 찬송가를 눈물 반 울음 반으로 부르고 있었다. 일, 이절 연속되는 찬송가를 눈물을 훔쳐 가며 반복해 불렀다. 같이 부르는 형제들의 얼굴이나 이 분의 얼굴 모두에 무엇인지 모르는 기쁨과 즐거움이 흐르고 있었다. 무슨 찬송가를 부르기에 이러나 싶었다.

안내하는 형제에게 왜 그러느냐고 물은즉 그 자매가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문제가 풀어지면서 그간 의미도 모르고 불렀던 찬송가가 자기 마음으로 들어와 자기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찬송가 간증이란다.

찬송가를 부르며 간증을 하고 있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본지라 그럴 수도 있나 보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찬송가가 끝나자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보았음직한 시가 흐르기 시작했다. 비파 연주에 맞추어 어느 때는 높고 어느 때는 나즈막한, 시를 읊는 여운이 가슴을 울리며 파고든다. 한참 시가 흐르고 나면 또 다른 쪽에서 다시 시가 연속된다. 어느 것은 장엄하고 우렁차게 또 어느 것은 낮고 속삭이듯 주고받는 시가 계속되었다.

 

옆 형제에게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하니까 시(詩)를 한다고 한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들이 주고받는 낭송이 시라는 것을 알았다. 시편 몇 편이냐 물으니 성경 시편 가운데 있는 시가 아니라 한다. 지금 시를 읊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의 영 안에서 주님을 찬양해 내는 찬송시라고 한다. 사실 난 그때까지 성경에 찬송시라는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 성경 곳곳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이 있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마음에 감사함으로 서로 화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있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고전14:2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엡5:19)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3:16)

 

 

중국인들의 시를 짓고 낭송하는 실력은 대단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면 시를 배우고 지으며 낭독하는 것이 생활의 한 방면으로 자리한다. 외국인인 우리로서는 중국인들이 낭송하는 시의 의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은유적이고 비유와 풍자가 가득하다. 중국시는 서정적인 흐름과 은유를 내포한 산문조의 음률을 가진 노래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깊다.

해설해 주는 형제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시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주님과의 은밀한 대화를 마음과 입을 통하여 주님을 표현하는 감칠맛 나는 찬송시의 의미를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시편의 그 많은 시들이 이렇게 읊어지고 낭송되었는가 싶으니 새롭게 느껴졌다. 우린 교회 안에서 찬송가나 부르는 것이 고작이다. 시와 시로 서로 화답하고 찬송으로 주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예배인가가 새삼스러웠다. 성경에 있는 이러한 실행들이 어찌하여 우리 가운데는 전달되지 않았을까?

 

처음 보는 중국 지하교회의 모습도 신기하지만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는 중국인 형제자매들 간의 교통은 더욱 신기하게만 보였다. 중국 형제들은 성도들 간의 영적 대화를 교통이라 한다. 주님이 주신 분량만큼 주고받는다는 뜻이다. 통하는 것들을 같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교통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은밀한 대화는 교제라고 한다. 수직 간의 영적 교류를 교제라고 하는 반면 수평 간의 흐름은 교통이라 구분한다. 수직 간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형제들 간의 수평적인 교통을 통하여 마치 세마포를 짜듯이 하나님과 사람이 엮어진다. 세상 얘기를 주고받는 것을 듣고 본 일이 없다. 교회 안에서의 교통은 어색함이 전혀 없다. 물이 흐르듯 막힘 없는 영의 흐름이 있다. 이것이 끝나면 또 어떤 것이 나올까? 신바드 모험과 같은 신비함이 다가왔다.

 

 

찬송시가 끝나자 기도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하자 한 사람 한 사람 꿇어앉으며 1-2분 정도의 짧고 간결한 기도들이 줄을 이어지듯 계속되었다. 모두 주님의 흐르심을 찬양하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그분의 능력과 보살핌에 감사하는 기도들이었다. 중언부언이 없는 그렇다고 경건한 단어를 쓰지도 않은 짧고 간단한 일상의 말들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찬송시까지는 어제까지 누린 주님을 찬양하고 말해내는 것이고 시작 기도는 오늘 열려질 말씀들의 제목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오늘 집회 가운데 주님께서 들으시고 열어주실 말씀들을 기도로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 한다.

집회에는 예배 프로그램이나 절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인도하는 형제도 없다. 주님의 흐르심에 맡긴다. 어떤 형식이나 제약도 없다. 누구 하나 상관하는 사람이 없다. 주님이 선포되고 말씀이 열리는 대로 흐르도록 할 뿐이다. 자유함이 있다. 살아 움직이는 흐르시는 성령을 볼 수 있다. 한참이나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옆 형제가 말을 걸어온다.

"형제님. 한국교회는 어떻게 생겼습니까? 저는 외국에 나가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외국 교회의 집회 모습을 보면 참 이상한 것 같았습니다.”

“무엇이 이상하다고 생각되시던가요?”

“외국 교회가 모두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떤 한 사람이 다른 옷을 입고 앞자리 높은 곳에 올라가 혼자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을 목사라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목사라고 합니다. 그것이 어째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셨나요?”

나는 중국 형제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교회, 목사가 앞자리 높은 곳에 올라가 설교하는 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이상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 어느 곳이나 그렇고 또 모두가 주목할 수 있도록 보다 높은 위치에서 말하는 것이 여러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국 형제의 눈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이방인인 외국인에게 제일 먼저 물었을 것이다. 중국 교회와 내가 보았던 교회와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다. 중국 교회 안에는 높고 낮은 자가 없다. 모두가 형제이다.

“형제님은 그것이 이상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목사라면 말씀을 전하는 종의 신분일 터인데 종이 어떻게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할 수 있습니까? 아래에서 올려다보면서 말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닙니까?”

이 말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들어왔다. 목사가 높은 곳에 올라가 얘기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 가운데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기준이었다. 그것이 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상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요, 섬기러 오신 분 아닌가? 주님은 종으로 오셨다. 종으로 오신 분의 자세라면 그 자세를 낮추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말은 섬긴다고 하면서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은 조금은 도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형제의 말은 무리가 아닐듯 싶었다. 학교 선생님도 높은 곳에서 말하지 않느냐고 해보았다. 학교 선생님과 교회 목사와는 근본적으로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신분이나 지식적으로 모두 학생들보다 위지만 목사는 신분상 종이 아니냐고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교회에는 높은 곳이 없다. 모두 평면이다. 이야기하시는 분이 잠시 몸을 일으켜 세워 말씀하실 뿐이다.

형제는 이방인 친구인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긴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으니까, 그것도 자기 나라 말이 통하는 외국인이니 얼마나 물어보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며 궁금할까?

“형제님. 한국 예배당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난 순간 이 중국 형제가 아무리 궁금한 것이 많다고는 하지만 참 시시한 것도 물어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은 또 어떤 말을 물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동시에 묻는 말에 어떻게 대답할까 걱정되었다.

“어떻게 생기기는요. 예배당에 따라 넓은 곳도 있고 좁은 곳도 있지만 대개는 앞쪽에 말씀을 전하는 분이 서는 강대(講臺)가 있고 그쪽을 향하여 의자를 진열해 놓고 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그래요. 그러면 예배당이 정사각 네모입니까? 긴 네모 모양입니까?”

“대부분 건물 형태에 따라 다르지만 긴 네모가 많지요. 앞 강대를 보고 길게 의자를 놓으니까 자연히 긴 네모지요. 어느 곳은 체육관과 같이 둥근 곳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배당과 같이 정사각형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앞을 향해서 앉는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형제님. 지금 이 예배당을 보세요. 어떻게 생겼어요? 형제님이 다니는 예배당과는 다르다는 말씀이지요.”

예배당의 모습이 네모지면 어떻고 길면 어떠하며 또 설마 둥글게 생겼으면 어떤가?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묻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예배 상황을 지켜보려는 내 주의를 빼앗기는 것이 조금은 싫게 느껴졌다.

“네모네요. 한국과 다르다면 한국은 말씀하는 이가 앞에서 전하고 그래서 앞을 보고 앉아있는데 여기는 가운데 네모진 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것이 다릅니다.”

“그래요. 중국 우리들 예배당은 네모졌고 가운데 네모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예배를 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

 

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물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아세요'라는 말 뒤를 이어 그 형제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내 교회 생활 25년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난 그 후 두고두고 왜 그런지 아세요 라는 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는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네모난 예배당은 바로 번제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배하러 올 때 우리의 생각이나 관념, 지식, 그리고 주님이 아닌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는 이 번제단에 태워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만족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은 태워져야 합니다. 번제단은 가로 세로가 모두 같은 정사각형인 것과 같이 우리의 예배당도 사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번제단에서 주님이 아닌 우리의 모든 것을 태우고 들어와야 하며 지성소 안에 들어와 주님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가운데 네모난 모양의 상은 우리 가운데 거하는 장막을 상징하며 빙 둘러앉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3개 지파씩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나온 여호와의 군대입니다. 설혹 이것이 하나의 그림자일지라도 실제를 갖고자 하는 뜻에서 그림자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예배당은 그저 성도들이 모이고 예배하기 편리하게 준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여기에 이런 의미를 가지고 예배당을 준비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다. 그들 말대로 신앙이며 모든 생활을 성경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읽을 수 있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성경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설사 행하는 것이 그림자일지라도 말씀 안에서 실제를 살아내고자 하는 소망이 엿보였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읽을 수 있었어도 하나님의 마음은 만지지 못하였다. 예배당은 주님과 우리가 더불어 함께 나누는 자리이다. 사람들이 모여 예배 드리는 장소만 생각했을 뿐 주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장소는 생각지 않았다. 주인이신 주님보다 종 된 목사의 자리를 더 귀중하게 배려한 꼴이다.

집회 장소가 네모지든 둥글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모이는 장소로서 족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집회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내게 오는 느낌은 달랐다. 집회소는 하나님의 성막이었고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회막이었다. 주일날 습관처럼 드나들던 교회 출석과 다르다. 지성소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닌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집회소 안으로 들어가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어두움을 가지고 참여할 수가 없다. 주님 아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관념일 수 있으나 주님을 본다는 경건이 따랐다. 그렇다고 집회 장소를 신성시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집회 장소일 뿐이다. 육으로, 혼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보다 영 안의 깊은 교통의 장소가 되기에 충분했다.

 

 

 

집회를 주관하시는 주님

 

 

생각하는 동안 집회는 계속되었다. 나의 관심은 여기 목사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으며 언제 말씀을 시작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전체의 주의를 받으며 말씀을 시작하려는 기미는 없었다. 단지 한 사람씩 일어나 짤막하게 주님을 찬양하고 간증하는 것들이 계속되었다. 많은 분들이 그침이 없이 계속 일어서 입을 여는 것이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인상적이었다. 시작 기도의 내용이 그날 집회의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말씀은 그것이 확장되는 많은 증거와 간증들로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어졌다. 참석한 사람들의 거의 반 이상이 입을 열어 주님을 증거하는데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내용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성경이 열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성경의 부분 부분을 퍼즐을 맞추어 가듯 이어간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중국 교회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작 기도이다. 모든 분들이 아주 주의 깊게 기도하고 기도 내용에 특별히 귀를 기울인다. 처음 참석하는 나는 보통으로 하는 일상적인 기도이려니 생각했다. 한국 교회에서 보았던 것처럼 판에 박은 기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시작 기도를 놓치면 그날 모든 집회를 놓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집회 시작 기도는 교회가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기를 원하는 간구였다. 집회에서 주님과 대화할 내용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회는 주님과 교회와의 실제적 대화였다.

 

시작 기도는 그날 집회소에서 주님께서 응답하실 내용에 대한 제목을 선포하는 기도인 셈이다. 시작 기도가 어느 정도 종료되면 몇 분이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는 기도로 끝이 난다. 이어지는 집회 내용은 교회가 주님께 간구하는 시작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주어지는 집회이다. 기도 내용을 중심으로 성경이 열리고 간증과 함께 기도들이 계속된다.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주님과 만나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집회가 끝나고 마치는 기도는 주님이 교회에 주시는 응답이나 다름없었다. 기도에 100% 응답하는 집회이다. 응답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찬송과 환호, 찬양이 잇따른다.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신기한 것은 집회소 안에 성경이 몇 권이 안 되었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저는 어제 요한복음 3장 3절에서”라고 시작하면 전체가 약속이나 하듯 요한복음 3장 3절을 같이 외우고 또 다른 구절을 대면 전체가 같이 그 성경 구절을 외운다. 성경 전체를 모두 마음에 두고 외우고 있었다. “마태복음 5장” 하면 전체가 마태복음 5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 성경이 마음의 비에 기록되어 있는 듯 그침이 없다. 교회 안에 들어온 지 겨우 5년이 되었다는 옆 형제도 신약 전체를 외운다고 귀띔한다. 하나하나가 성경이었다.

 

집회소 안의 성경은 전부 10여 권에 불과했다. 성경을 들고 있는 이들은 모두 초신자들이다. 교회가 새로 온 분들을 위하여 배려한다. 나는 한동안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들이 왜 얼마 되지도 않은 성경 한 권을 못 살까 의문이었다. 성경 한 권이 우리 돈으로 1,300원에 불과하다. 최근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중화기독협회가 성경을 발간하여 값싸게 배포하고 있다. 그런데도 형제분들이 그 성경을 보시는 것 같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성경은 많은 부분을 개작하여 주님의 말씀을 변개시켰다. 온전한 성경은 구하기도 힘들고 비싸다. 1950년 이전 발행된 성경을 귀히 여긴다.

성경을 모두 외우고 있다는 것이 주님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과 벗하는 시간과 노력을 그만큼 줄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입을 열면 말씀이 포도송이처럼 연결되어 쏟아져 나온다. 말씀이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말씀을 사랑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듯 성경이 모든 것을 인도하고 있었다. 사람이 무엇을 한다는 느낌은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다.

예배는 한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전체가 참여하는 살아 숨 쉬는 뜨거움이 있다. 자세히 들어볼수록 기이하다. 지금까지 한 사람이 말하는 교회에서 듣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하나님은 만유이시고 만유에 가득한 분이시다. 그 크신 하나님을 한 사람이 증거해 낸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유이신 하나님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한 사람이 증거하면 과연 얼마나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다.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본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극히 일부의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짧지만 여러 사람이 말하는 것을 계속 들어보니 점점 색다르게 다가오는 주님이 만져지는 것을 느꼈다.

한 사람이 말할 때 들어보면 마치 코끼리가 큰 기둥과 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이가 일어서 코끼리는 긴 대롱과 같다고 말하고 아니 넓은 벽과 같다고 말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얘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얘기를 듣고 나면 코끼리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각자의 위치에서 코끼리를 만져본 장님 이야기를 종합해 가면 나중에 코끼리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말이다. 퍼즐을 맞추어 가는 듯한 느낌 그대로였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간 너무 많은 선입관 속에 묻혀 살았다. 집회는 당연히 어떤 사람이 나와서 이야기하고 결론을 짓고 그리고 끝내는 것으로 알았다. 교회 집회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아왔다. 한 번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 집회는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 어디를 가시거나 해서 이렇게 때우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주도 그 다음 주도 계속되었다. 중국 교회 집회 방식이 이랬다. 집회의 주인은 참여하는 모든 분들이었다. 마치 운동장에 들어온 선수들이 자기 위치에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처럼 모두가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모두가 열광하는 것 같은 긴박감이 있다.

 

내 평생 처음 대하는 집회 형식이라 옆자리에 앉은 중국 형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교회 집회가 언제나 이런 방식인가를 물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솔직히 왕 같은 제사장이 무엇인지 몰랐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오직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궁금한 것은 나보다 중국 형제가 더했다. 오히려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하는가를 되물어 온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집회를 하며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며 등등. 내가 경험한 한국 교회의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 형제는 마치 먼 나라 얘기를 듣는 것과 같이 전혀 알아듣는 눈치는 아니었다.

처음 중국 형제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목사라는 사람이 혼자 말하고 다른 사람은 자리에 앉아 듣는 것이 한국 교회 아니 전 세계 대부분 교회의 집회일 것이라고 했다. 말이다 끝나면 기도하고 찬송하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것이 전부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해주었지만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만 지었다. 성경의 어느 곳에도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라는 내용이 없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두 명 이상의 형제들을 같이 보내시며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1900년대 초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 단계에 있었을 때 한 사람이 말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말씀을 증거할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말하고 혼자서 집도하는 교회는 거의 부패되었거나 타락하였다고 한다. 사람은 어느 곳이나 같다. 인간이 중심인 곳은 인간 냄새가 나게 되어 있다.

교회 초기 단계, 어린 자들이 중심을 이루는 교회는 인도하는 사람 중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집회이다. 때문에 말하는 이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로 이해하였다. 중국 형제들은 사람을 떠받치는 교회를 가리켜 사단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지극히 어린 교회라고 말한다. 어느 교회든 사람이 주인 노릇하면서 부패하거나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앉으면 그것이 곧 교회의 타락이요 부패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사람이 주장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이미 교회는 아니라는 표정이시다.

이러한 곳에는 왕과 신하는 있어도 형제는 없다. 왕은 아부는 좋아하지만 비판을 수용할 수 없다. 왕은 말 그대로 심판과 권세를 가진 자이다. 교회 가운데 누가 형제를 심판하며 군림할 수 있는가? 주님께서도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왕들이 있어 형제를 판단하고 그 위에 군림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더럽히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무리 주님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주님은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게 말씀을 주시지도 않았을뿐더러 주셨다 하더라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는 것이 한 쪽 면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다. 주의 나라의 풍성을 가로막는 행위로 이해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필요 없는 세상 얘기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고 반문한다. 생각해 보면 한국 교회에서 듣던 설교라고 하는 내용의 태반이 세상 이야기였다. 중국 집회에서 세상 예를 들어 설명하는 성경 말씀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쓰레기 같은 세상 이야기로 설명을 해야 하는가 반문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 말씀만으로 집회가 계속되어도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너무 풍성하였다.

극치는 나중이었다. 어느 정도 말씀과 증거들이 다 나온 듯 싶을 때 뒤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몇몇 형제분들이 일어나 “제가 정리하고 싶습니다” 또는 “보충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조금씩 빗나간 말씀이나 잘못 증거 된 말씀들을 정리하여 주신다. 간단하게 말하지만 전체를 요약하여 오늘 집회에서 나타난 주님을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주듯이 정리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모자라다 싶으면 또 다른 분이 일어나셔서 또 다른 주님을 그려 주었다. 놀라운 그림들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나는 그저 “오 주여 이 사람의 눈을 열어 주님을 뵙게 하고 주님의 풍성한 상에 참여케 해주신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곤 난 끝내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증을 털어냈다.

“목사님이 누구세요. 왜 설교하는 분이 없으세요? 이것이 집회의 전부입니까?”

“우리 중국 교회에는 목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수발하는 어른 형제가 계시는데 주임(主任)형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번 집회도 이렇게 합니다.”

 

가져온 곳 : 주님사랑님 블로그

 

가져온곳: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목장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BOKT/24024

 

발인예배 기도문

(2020.01.10)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 사람의 뜻이 아닌 것처럼

사람은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하늘의 소망을 갖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저희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000 성도와 이별하려고 합니다.

흙으로 빚어진 육체는 땅에 묻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영의 몸은 하늘나라로 간다고 하신 하나님!

000 집사님과 두 아들 00이 00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000 교우의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안아주시고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비록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고 하오나

아직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이 땅에 둔 채

먼저 떠나는 000 교우를 보내야 하는 가족들의 이루말할 수 없는 슬픔을 사랑으로 위로하여주시옵소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비록 남편과 아버지의 빈자리가 아무리 크다 할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넉넉히 채울 수 있도록 주께서 간섭하시고 그 길을 인도하여주시옵소서.

 

00이 00이! 늘 하나님 바라보고 어렵고 힘든 일을 극복하여 담대한 마음으로 더욱 굳건하게 살아서

먼저 가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귀한 아들 되게 하옵소서.

 

은혜의 하나님! 이곳에 참석한 사랑하는 유족과 조문객들에게 믿음의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의 새 소망을 주시고

고통과 죽음이 있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모든 장례 절차가 은혜 가운데 시작하여 은혜 가운데 마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소백나그네 / 소백촌놈

 

펌 http://blog.daum.net/dfgiyo/6140039

www.youtube.com/watch?v=n1e6a-RlT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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