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 연이 본 천국과 지옥 

 

소망이야말로 영혼이 천국으로 날아갈 때 꼭 필요한 날개라고 존 번 연은 말했다. 주님을 사랑함 천국의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좋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도록 만들듯이 두려움도 영혼의 열정가운데 하나이므로 지옥의 두려움이 악한 생각을 피하고 멀리하도록 만든다고 그는 말한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죄악의 쾌락을 추구하다가 영원히 비참한 운명에 떨어진 멸망한 자들의 슬픈 애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에 빠져 드는 순간 그 운명을 벗어나기에 너무 늦었음을 애통해 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땅에서는 그래도 저마다 똑똑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 이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운명에 떨어지지 않도록 이 책이 경고 하는 위험 표지 역할이 되었으면 한다.

혹시 이 책을 읽고 그 안에 생생한 묘사된 지옥의 고통이 두려워 방주이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들어가 임박한 진노”(3: 7)를 피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루 말 할 수없이 큰 자비 일 것이다이 책이 환상의 형식으로 사용한 점 때문에 혼란을 겪는 분이 없기를 바란다고 존 번 연은 말했다.

우리의 영광스런 신랑이 우리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하며 부르신다. 독자 여러분이 서둘러 해야 할 일이란 소망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다.


악하고 방종한 사람들

  악하고 방종한 사람들이 용서 받을 가망성이 사라질 정도로 죄의 길로 치닫다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걱정하고 두려워할 상황을 만날 때 맨 먼저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자기를 벌하실 하나님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이다.

한번 이런 생각을 품으면 차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들이 믿고 싶은 바를 입증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논리를 찾아낸다.

이런 자 들은 자연이 우주의 여왕 또는 신이라고 믿고 그에 따라서 자연의 이치에 순응을 한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 땅에서 후회 없이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이 자연의 동물이나 벌레 또는 꽃으로 피어 날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 자연의 다채로운 변형들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게 될 것 이라고 주장한다.


천사의 방문

  에페네투스는 이런 견해에 말에 미혹이 되어 삶의 의미가 없어져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에페네투스 네 자신을 영원한 불행에 던져서 네 불구대천의 원수를 기쁘게 하지 말라.

지금 네가 스스로 치명적인 자해를 가하면 그것으로 네 멸망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실진대 이렇게 고의로 그분의 형상을 멸하고서 어찌 그분에게

자비를 얻을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느냐?”라고 하는 음성을 듣고

그는 자기가 어리석은 짓을 하려던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자기를 신기한 방법으로 구해주신 하나님께 무릎을 끊고 감사 기도를 하며 강둑에 앉아 상념에 잠겨 있을 때 홀연히 영광스런 빛이 온몸을 감쌌다.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는 그런 광채였다.

이 빛이 어디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영광스러운 형체가 나타났다.

얼른 보기에는 사람 같으나 형언 할 수 없는 빛과 영광의 투명한 광채가 주위를 두르고 있었다. 천사가 다가오는 동안 끊임없이 빛이 발산 했다.

그의 용모는 경외감을 주었고 극히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 이지만 그 빛에서 발산하는 광채를 견디지를 못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천사가 손을 내밀어 팔을 일으켜주자 새 힘이 생긴 것에 대해 그 천사를 향해서 감사하며 경배를 드리려고 하자 그 천사는 경배는 너를 지으신 하나님께만 하고 내게 하지 말라고 하며 나도 너와 같은 피조물이다 하고 말했다.

(천국에서는 주님 이외에 누구라도 높이면 두려워하고 화를 낼 정도로 싫어한다고 한다)

천사가 온 목적은 에페네투스가 영원한 멸망으로 몸을 내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온 것 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영혼들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얼마나 악한 생각을 가지고 그를 멸망 시키려고 하는지 내려다 보셨단다.

사탄이 이젠 다 되었다 하고 안심할 때 올 무를 끊으시고 그를 구출 해 주셨다고 하며 천사가 온 목적은 영원한 세계의 실재를 앞으로는 의심하지 말고 확신하도록 하려 그를 데리고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려고 한다고 했다.

그것들을 보고 나면 그의 눈이 강해져서 비물질적인 것들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천국으로 인도 되다

  의식도 하기 전에 그의 몸이 공중에 떠 있었고 올라가면서 빛의 세계를 바라보다가 아래를 내려 다 보니 땅이 그렇게 시시해 보일 수가 없었다.

천사는 자기는 섬기는 영으로(1: 14) 구원의 후사가 될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냄을 받았다고 하며 물어 볼 것이 있으면 물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에페네투스가 자기 발 밑으로 아스라이 보이는 어두운 지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위로 올라갈수록 그 지점은 더 작아지고 제가 이 빛의 지대로 들어 왔기 때문에 갈수록 검게 만 보입니다 하고 질문하자 천사는 여기서 어둡고 보 잘 것 없게 만 보이는 저 작은 지점은 방금 전만해도 네가 살던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세상이란 것이 얼마나 작은가 볼 수 있다.

저 세상에서는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땅을 한 뼘 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아 둥 바 둥 살아가고 있다. 땅은 여러 왕국으로 구분되어 있다. 왕국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도 악하고 비열한 행위가 숱하게 자행되었고 그리도 많은 피를 흘렀다.

작은 구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불멸의 영혼을 잃어버리는 곳이 바로 저 땅이다.

그들이 헌 신짝처럼 취급하는 영혼이란 평강의 왕께서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실 정도로 소중한 것이다(16: 26)

사람이 어리석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위에 것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마음에 천국을 올려놓고 사는 사람은 세상이 작고 시시하게 보이지만 보이는 현실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어두움의(죄의) 상태에 머물러있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어둠 속에서 살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빛의 왕께서 그들 사이로 내려가셔서 참 생명의 빛”(8: 12)을 환하게 비추어 주셨고 그분의 사역 자들이 지금도 같은 빛을 비추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하고 어둠을(죄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여전히 어둠가운데(죄 가운데) 살면서 빛(진리의 말씀)으로 나오지 않는다(3: 19)고 했다.  

타락한 천사들에 대한 정죄

  에페네투스가 천사에게 또 질문을 했다.

 세상 위를 떼 지어 배회하는 저 검고 역겨운 무리들은 무엇입니까?

저들이 당신의 광채를 견딜 수 없어서 그랬는지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고 묻자

천사는 저들은 타락한 변절한 영들이다.

교만과 반역의 죄를 지은 까닭에 전능자의 명을 따라 하늘에서 쫓겨나 공중에서 배회하고 있다.

어둠의 사슬에 묶인 상태로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지내야 한다. 저들은 공중에서 세상으로 내려가도록 허락 받았다.

내려가서 선택 받은 사람들을 시험하기도 하고 악인들에게 멸망의 인을 치기도 한다.

지금은 저들의 형상이 검고 역겹지만 저들도 한 때는 빛의 아들들로서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찬란한 광채를 발산하는 옷을 입었던 자들이다.

저들은 빛의 옷을 상실한 게 모두 자기들의 악한 죄 때문이었는데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똘똘 뭉쳐 있다.

저들은 순결과 영광을 상실한 까닭에 여전히 자기 위치를 지키면서 위대하신 창조주에게 복종하는 영(천사)들을 만나면 도망친다 고 말했다. 그러자 에페네투스가 또다시 질문했다.

이 신실하지 못한 영들이 세월이 흘러도 다시 하나님과 화목할 소망이 영영 없는 것인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라도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인지 대하여 질문하자 천사는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저들은 영원한 멸망을 받았다.

저들은 유혹 하는 자가 없었는데도 최초로 죄를 지어 하늘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더욱이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신 복되신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천사의 본질을 취하지 않으시고 변절한 천사들을 모두 멸망에 버려두셨다

그분은 다만 아브라함의 씨로 오셨을 분이다. 이런 연유로 타락한 천사들은 사람의 아들들을 그토록 증오하고 대적한다.

자신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도록 선고를 받은 판국에 사람의 아들들이 천국의 후사들이 된 것이 여간 배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하고 말했다.  

천국과 그 영광을 보다

  천사와 함께 에페네투스는 태양계를 넘어 우주를 빠른 속도로 빠져 나와 천국의 영원한 집으로 향했다.

천사는 이제 그 영원한 집을 보게 될 것인데 그의 역량이(영적으로 성장한 것만큼) 허락하는 한도에서 목도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본 것을 그의 역량을 다 동원해 독자에게 소개해보고자 했다.

이 영광스런 처소에 맨 처음 가까이 이르렀을 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밝은 빛을 발하며 나와서 그를 복된 자리로 안내했다.

 저마다 근심과 슬픔과 근심의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온전한 기쁨만 얼굴에 가득했다.

그곳에서 만물을 자신의 본질로 흡수하여 하나로 통일하는 완전하고 가까이 다가 갈수 없는 빛을 보았다.

그 빛으로 말미암아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영혼조차 투명하고 가벼웠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서 발산되는 빛만이 천상의 거처를 두루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에 비하면 태양 빛은 차라리 어둠에 가까웠다.

높은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과 성도들의 벅찬 할렐루야와 찬미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뵙기에는 너무도 찬란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이라 부르기에 합당하시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 재로써 천국을 충만하게 채우고 계시기 때문이다.

복락과 차분한 기쁨, 환희의 강물이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흘러나와 그분의 행복한 처소요 영원한 왕국이 자리 잡고 있는 천국의 모든 복된 거 민에게 흘러갔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그분의 인자와 영광의 찬란한 광채가 사방으로 발산되었고 그분의 선택된 성도들과 종들은 영원하고 완전한 그분의 덕을 보고 찬송했다.

땅에서 올라온 에페네투스의 시력으로는 보좌에 앉으신 영원한 빛과 영광의 근원이신 분에게 발산되는 작은 빛 줄기 하나라도 감당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다

  그는 첫눈에 엘리야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엘리야는 에페네투스에게 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후에 다른 사람에게 이해하도록 전하는 것이 불가능 할 것 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아직 영화로운 상태로 변화하지 못한 다시 말해서 물질적 육체에서 자유롭게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아무리 설명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고전2: 9)

그러나 엘리야의 육체는 사멸 자들이 다 당하는 운명을 당하지 않고 다만 어떤 의미에서 육체적 죽음에 버금가는 변화를 겪었으므로(벧전4: 1, 8: 11-17)엘리야는 육체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상태로(영화로운 상태) 변했으며 이제는 보좌를 옹위하고 서있는 복된 천사들과 같이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누리고 있는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고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의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왜냐면 천국에서 맛보는 행복은 항상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국의 행복의 핵심은 영원 무궁히 영광스러운 복되신 하나님을 뵙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로우시기 때문이란다.

하나님에게 속한 완전하고 영원 무한한 것들은 천국백성의 영광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으며 영원한 새로운 지식으로 더 성장해 간다고 했다.  


죄의 비참함에서 해방됨

 또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서 복을 누리는 영혼들은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로부터 영원히 해방되었다고 한다.

죄야말로 피조물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뜨리고 그 운명을 피조물에게 지어 준 장본인이다. 시초에 복되신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복스럽게 지으셨다죄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지워버리는 일이 없었다면 천사들도 인간들도 비참 이라는 단어를 몰랐을 것이다.

배교한 천사들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망쳐 놓은 것이 죄이다.

죄 때문에 인간은 헤어나올 길이 없는 영원한 비참의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행복한 천국에서는 모든 거 민이 우리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 죄에서 해방되되 영원히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큰 자비인가!

그 분께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찬양을 영원히 드려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

아래 세상에서는 아무리 덕망이 높고 거룩한 사람이라도 부패의 짐에 짓눌려 신음한다.

사사건건 죄가 달라 붙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질질 끌려가기 일쑤이다.

이 사망에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 24)는 것이 적지 않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자 예수님의 소중한 사람들의 탄식이었다.

이른바 성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부패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죄가 여간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을 벗을 때 영혼이 새장에 갇혔다가 풀려난 새와 같았다.

아래 세상에서 평생 싸워온 죄를 마침내 이기고 천상의 힘을 입어 이 복된 대로 가볍게 날아올라왔다. 이곳에서 그들의 싸움은 끝나고 사망이 이김을 삼킨바 되었다’(고전15: 54)

죄로 인해 일그러지고 더럽혀졌던 그들의 영혼이 이곳에 와서는 영원히 복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영원하신 아버지 앞에  ‘티나 주름 잡힌 것’(5: 27)이 없이 찬란하게 빛난다.”


죄의 유혹에서 해방됨

또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둘째로 이곳에서는 복된 영혼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있듯이 죄를 지을 만한 조건에서도 완전히 해방되어 있는데 그것이 그들에게는 여간 큰 행복이 아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자신이 완전히 무 흠하고 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 했으나 죄의 유혹에서는 벗어나 있지 않았고 그것이 그에게 큰 불행을 끼쳤다.

사탄이 그 동산에 잠입하여 그를 시험 했을 때 그는 시험에 철저히 넘어져버렸다.

금단의 열매를 먹고서 타락 했으며 그가 타락 함으로서 인간 본성도 결과적으로 그의 모든 후손도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 있는 복된 영혼들은 마귀가 누구도 시험할 수 없을뿐더러 어떠한 부패와 오염도 침입할 수 없다. 순결하고 거룩한 것만 용납된다.

배교한 영의 교활한 제안도 이곳에서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아래세상에서 온 땅을 쉬지 않고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던 우는 사자’(벧전5:8)

이 복된 불멸의 지대에서는 영원한 사슬에 단단히 결박 된 채 지옥에 갇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을 날만 기다린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아름다움을 상실하고 공허와 허영에 사로잡힌 채

오히려 그 타락한 매력과 유혹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호리던 세상도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6: 12) 그 간계를 물리치고 이곳에 안전하게 당도한 복된 영혼들에게는 더 이상 시험을 하지 못한다. 아래 세상에서 여전히 세상과 투쟁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유혹이 대단히 강렬하지만 천상의 거처에 와 있는 우리들에게는 지상의 모든 낙이 시시하고 누추해 보인다 이곳의 우리는 세상과 그 유혹을 이미 모두 극복했다.

우리가 들고 있는 종려가지가 증거 하듯이(7: 9참조) 승리하신 우리 예수님의 보혈에 힘입어 이미 그것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곳에는 우리의 평화를 깨드릴 만한 것이 없고 다만 영원한 평강이 우리의 행복에 얹혀져 있다. 우리가 죄와 그에 따른 모든 유혹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들에서 해방됨

셋째로 이곳에서 우리는 죄의 결과에서 해방된다.

죄의 결과들은 영원한 고통과 절망에 뒤덮인 어두운 지대에 갇혀 살게 된 자들이 항상 끌어안고 신음해야 하는 형벌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인데도 그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

아래 세상에 모든 사멸 자들이 발견하듯이 죽음이 들어오게 한 장본인들이 바로 죄이다.

모든 사멸 자들이 발견하듯이 죽음은 하늘의 준엄한 법령이 죄에 대해 매긴 공 의로운 대가이다(6: 23)

그러나 생명의왕 곧 세상에서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양이 승리를 거두심으로써

죄와 죽음과 지옥은 영원히 이곳에서 추방되었다.

생명의 왕은 몸소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뿐 아니라 죽음을 이용하여 권세를 부린 자 마귀까지 이기셨다(2: 14참조)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셨으니 그 거룩하신 이름에 영원한 찬미와 개가를 바치는 것이 합당하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이 우리가 이 복된 곳에서 건짐 받은 상태인데 하지만 이런 것들은 천국의 복락 가운데 작은 부분을 차지할 따름이다.”하고 말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함

엘리야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직접 뵘으로써 그 사랑에 참여하고 그 사랑을 누리는데 그분의 웃는 낯이 우리들의 영혼을 기쁘게 한다

그 이유는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30: 5) 이렇게 하나님을 직접 뵙는 특권에 힘입어 아래 세상에 사는 성도들 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된다

그분을 직접 뵘으로써 우리 이성이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 후4: 6)을 받아 환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본성과 신성한 덕성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고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4: 13)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 4)가 되어 그 성품이 성도들 안에 찬란히 빛난다.

아래 세상에서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으로 즐거워하지만 이곳의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그 분을 뵙는다.

아래 세상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즐기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한량없이 즐긴다. 우리는 행복의 대양에서 헤엄을 친다.

아래 세상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갖는 사귐이 자주 단절되고 중단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단절이나 중절 없이 항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들의 충만함

  아래세상에서는 사랑에 두려움이 섞여 있고 두려움에 고통이 따르지만 (요일4: 18)

 이곳에서는 사랑이 온전하며 온전한 사랑이기에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

이곳에서는 우리는 복되신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며 서로를 자신처럼 사랑한다.

우리 모두는 한 분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모든 형제자매들이 우리에게 다 소중한 존재들이다.

아래에서는 지식도 매우 불완전하여서 깨진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지만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보며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아 시 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래세상에서는 기쁨의 한구석에 슬픔과 탄식이 스며있게 마련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슬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슬픔의 원인인 모든 죄가 추방되었고 죄의 결과인 모든 슬픔은 그쳤다. 사실상 우리의 복된 구주 덕분에 땅에서 죄로 인해 슬퍼했던 경험 자체가 이곳에서는 오히려 기쁨을 배가 시킨다.


무제한 적인 역량

아래세상에서는 육체의 감각적인 오관의 창만으로 우리 정신에 빛으로 좁은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지만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시가 더 영광스럽게 나타나며 실수와 오류가 있는 감각들을 통해서 지상적 이미지들이 우리의 정신에서 깨끗이 벗겨졌다.


더 분명한 시각

아래세상에서는 하나님을 아무리 순수하게 안다 하더라도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금에서 찌꺼기가 다 빠져나갔고 우리의 생각도 하나님의 단순하심과 순수하심에 좀더 부합되었다.

아래세상에서는 믿음으로 알았던 하나님의 작정과 뜻 섭리와 경륜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본다.

아래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방식들을 헤아릴 수 없을 것만 같았고 그것을 알려 하는 것조차 불법으로 생각했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이런 것 들이 우리의 행복을 구성하는 복들 가운데 몇 가지이다.  


영적인 몸의 특성들

  천국의 진정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부활하여 영혼과 재 결합 때 가서야 비로서 온전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큰 자비를 받은 복된 에녹과 나는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한 혜택을 받아 육체를 입은 채 이곳으로 옮겨져 왔다.

우리(에녹과 엘리야)는 홍수 이전과 이후의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이 부활하신 일과 그분을 통해 모든 성도가 부활할 일을 가르치기 위한 표상들이다.

부활할 때 이곳의 복된 사람들의 육체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신령한)몸이 될 것이다.

(거룩한 선지자 엘리야는 내게 손을 만져 보게 했다) 영적 몸이 무엇인지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적 몸은 모든 부패의 요소가 깨끗이 씻겨나간 정결한 몸이다.

하지만 아래세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 몸은 바람과 공기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하고 말했다. 몸이 영적인 이유는 고기와 음료와 잠과 의복 등 아래 세상에서 몸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한 물건들 없이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 모두가 주님을 직접 뵙는 복된 경험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고 유지되는 것이 라고 했다. 또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부활 시에 입을 몸은 죽음을 모르는 불멸의 몸이다.

 아래세상에서 인간의 몸은 사멸적 이어서 죽어 흙으로 해체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 몸은 영원히 썩지 않고 죽음에서 벗어나 있다.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고 후5: 4)고 우리의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을 것이다.

부활하면 그들의 육체는 더 이상 죽음을 맛보지 않게 된다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사멸적이어서 죽음에 예속된다.

그러나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의 상태에 들어갈 때는 불멸의 육체가 될 것이다.”하고 말했다.  


부활의 몸

에페네튜스가 다시 질문을 했다 이곳에 와 보니 육체가 없이도 참 복되고 영광스럽고 행복하게들 지내셔서 굳이 육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현재 죽음의 권세에 놓여 있는 신자들의 육체가 장차 다시 살아나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엘리야에게 물어보았다.

엘리야가 말했다. “복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죽음을 맛보셨듯이 그 자격으로 다시 살아 나셨다.

그러므로 그분을 가리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5: 20-23)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신데 (1: 22참조) 몸의 지체들 없이는 머리가 되실 수 없으며

그분의 지체들도 차 서를 따라 다시 살아나 그분과 함께 영원히 거할 것이다.

육체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불멸의 생명으로 살아날 것이다.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거룩한 직무에서는 서로서로 동등하지 않지만 둘이 함께 있는 것이 꼭 필요하다.

아래 세상에서도 선행은 영혼의 구상과 결단으로 계획되지만 실행은 육체가 한다.

이로써 모든 은혜가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회개의 슬픔에서는 눈물이 공급된다. 감사에서는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혀가 사용된다.

아래 세상에서 쾌락과 고통을 이기는 일은 영혼이 육체와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가능하다.

아래 세상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영혼과 육체가 경주를 함께 했으므로 장차 상도 함께 받을 것이다.

큰 심판 날에 복된 자들이 의와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때(딤후4:8) 영혼과 육체가 함께

존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불멸

  그리고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천사들은 원래 비물질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과 달리 인간은 복되신 예수께서 값을 치르시고 사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심으로 불멸 성을 갖게 된다. 타락한 천사들도 역시 불멸하지만 그들의 불멸에는 영원한 비참이 따른다.

그들의 불멸은 차라리 존재가 소멸되도록 해달라고 수백만 번 간청하게 만드는 저주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복된 불멸은 천국의 행복이며 그러므로 영광스러운 불멸이라 불러야 옳다.  


강건함

  천국의 복된 영혼들의 육체가 누리게 될 또 다른 행복은 강건하여서 고통을 겪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래세상에서 성도들이 입은 몸은 약해서 병에 걸리거나 육체의 고통과 불구가 극심하여 차라리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경우가 있다.

왕성한 육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리어 삶이 몹시 궁색하고 불편하게 된다. 감옥에도 갇히게도 된다. 이런 것들을 감안할 때 아래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육체가 비참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의 상태는 완전히 다르다. 이곳에는 저주가 들어오지 못한다.

위에서 말한 모든 것 들은 죄의 결과들이다. 이생에서는 끊임없이 먹고 마심으로써 활력을 유지해야 했으나 이 복된 상태에서는 육체가 영적 특성을 지니며

외부의 영양 공급이 없어도 성령의 초자연적인 권능으로 생명이 유지된다.

부활의 날에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처럼 될 것이다.  


민첩함

  우리의 행복의 또 다른 부분은 우리 육체가 민첩하여 져서 형언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래 세상에서 살 때 우리의 육체는 거북하고 불편하여 영혼에 큰 부담을 주었다. 그러나 부활의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새가 공중을 나는 것 보다 더 빨리 이동하게 될 것이다.  
순결함

  부활의 날에 우리의 육체가 지금 나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순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우리의 영광은 이곳에서 우리의 육체가 순결하게 되어 죄가 하나도 없게 된다는 데 있다.  

영광스러움

  지금까지의 말을 정리하자면 부활의 날에 성도들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다.

 복되신 우리 구주의 영광스러운 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찬란한 몸을 입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어린양인 복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누추하고 부패한 몸을 변화시켜 당신의 몸과 같게 하실 것이라고 쓰여있다.

그분의 권능에 힘입어 성도들의 몸이 썩을 것으로 심고 (고전15: 42) 영광스러운 것으로’ (고전15: 43)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 복된 부활의 상태에서 그들은 아버지의 승리의 나라에서 해보다 밝게 빛날 것이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누리는 복된 상태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행복한가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이곳의 세세한 상태까지 다 네게 말해 준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게 할 지라도 너로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 가운데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같이 그것을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것도 있는 까닭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문자적으로 말씀을 깨닫는 것은 촛불의 희미한 빛으로 비교 할 수 있고 말씀의 속뜻은 대낮의 찬란한 태양빛처럼 빛을 비추는 것으로 비교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깨달음의 분량의 빛은 다 동일하지는 않다.

우리가 이곳에서 복되신 하나님에 관해서 지닌 온전한 지식은 피조물인 우리의 사모하는 분량만큼 깨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엘리야가 설명을 마치자 에페네투스는 궁금한 것이 다 해소가 되면서 그를 오래 동안 괴롭혔던 원인이 자기 스스로 말씀을 오해하고 잘못 깨달은 데에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천국은 고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고 그 복된 자들이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널리 전하고 그분의 찬란하고 영원한 뛰어나신 면들을 선포하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지극히 큰 만족과 기쁨이기 때문에 그들은 영원 무궁히 그 일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다.  
등급이 각각 다른 영광

  에페네투스는 천국에서 안내자에게 인도되어 오면서 많은 복된 영들을 보았는데 그 중에 어떤 이 들은 다른 영혼들보다 광채가 더 찬란했다고 한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복된 영혼들에게 각각 다른 등급이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의 모든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과 영광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이다.

 앞에서도 말 했듯이 이곳에서는 그분을 직접 바라보는 일이 행복과 영광을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는 영원의 샘이다.

하나님을 뵈면 뵐수록 더욱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 영혼을 그분의 본성에 더욱 가깝게 만든다. 바로 거기서 우리의 영광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이 영광의 등급의 차이를 낸다.

차이가 있다 해서 이 복된 영역의 어딘가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 광명의 영역에 사는 무수한 거민들 가운데는 능력과 기능을 다하여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지 않는 영혼은 단 하나라도 없다.

다만 그들의 능력과 기능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도 차이가 있고 그들의 영광에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다른 영혼이 자기 보다 더 큰 영광을 갖고 있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없다.

오히려 그 사실로 인하여 자신들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찬송할 뿐이다.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복된 영혼 모두가 저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을 받아 모든 기능을 채움 받고 사는데 불평할 거리가 있겠는가?

더욱이 이곳의 복된 영혼들은 한결같이 순종하도록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모든 행복을 두고 살 정도로 그것에 만족하고 순응한다. 

마치 아래 세상의 우주에 떠 있는 별들은 저마다 영광스럽지만 크기와 광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영광도 저마다 다른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듯이 사람도 부활의 날에는 그러할 것이다(고전15: 41-42)

그러므로 네 질문에 내가 해주고 싶은 대답은 여러 가지 훌륭한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크게 사랑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이 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영광이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수하에 두신 화염의 사역 자들(104)사이에서조차 다양한 사역과 영광의 등급이 있다.

아마도 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런 천사들을 얼마쯤 보았을 것이다.”

거룩한 선지자 엘리야와 대화하는 동안 빛나는 형상이 내게 다가왔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얼마 전에 사별한 친구 주니우스가 다가오고 이었다.  


만질 수 없는 옛 친구의 몸

  주니우스는 에페네투스에게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반가운 나머지 두 팔을 버려 끌어안으려 했더니 친구가 손사래를 쳤다.

친구는 여전히 실체였으나 물질 적인 몸이 아니었으므로 죽을 몸을 지닌 사람이 만질 수가 없었다.

주니우스는 말하길 지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공의 앞에서 벌벌 떨기라도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면서 기고만장한 아래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잘 가르쳐 입증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페네투스는 친구에게 자네는 세상에서 그토록 열정을 불태우며 한평생을 살았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받은 것이 당연하다고 칭찬을 하자, 친구는 아래 세상에서 평생에 최선을 다 했을지라도 지극히 작은 상을 받기에도 턱없이 부족 하다고 하며 천국은 구주의 보혈 외에 다른 값으로는 살수 없다고 했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신 구주의 사랑과 구속의 자비는 영원히 찬송을 해도 모자란다고 했다.

그러자 에페네투스가 친구에게 자네 말이 맞아, 훌륭한 주니우스 라고 말하자 주니우스는 나를 훌륭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천국에서는 보좌의 앉으신 분과 하나님의 복되신 어린양 외에는 아무도 훌륭하지 않다고 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이곳에서 성도들의 큰 행복이라고 했다.  또 보좌 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크고 아름다운 화음으로 찬송을 부르는데 그 내용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 하도다(5: 12)하며 피조물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하며 천국에서는 지극히 찬란한 면류관을 쓴 이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놓으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하고

영광을 주께만 돌린다고 했다. 그리고 천국에 어떤 현자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찬란한 광채를 조금이라도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너무나 찬란하고 압도적인 광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피조물 가운데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크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복

  에페네투스는 주니우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직접 듣고 그도 친구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들을 말해달라고 했다. 이세상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엄 위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영원토록 내 찬송의 제목이 될 것이네.

 성도들과 천사들이 합하여 거대한 성가대를 이루고 있지.

이곳에 사는 복된 성도들과 천사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묵상하는 것뿐이야.

그 사랑의 품에 기대었던 사도가 드려주는 말도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 19)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랑으로 베푸신 유익은 수학적 계산 방식을 넘어서니 말이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먼저 아래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며 누린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베푸신 것이라네.

 우리의 존재 자체와 우리가 누린 모든 것이 전부 하나님에게서 나왔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100: 3) 그분에게 우리는 토기장이에 손에 들린 진흙과 같아서(64: 8)

그분은 우리를 얼마든지 다른 피조물로 만드실 수 도 있었지 우리는 우리의 출처와 사뭇 다른 존재가 되었는데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우리의 존재가 나온 태초의 공허로 영원히 남겨두실 수도 있으셨다는 말이라네.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 복의 근원이야. 다른 복들은 모두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하실 때 쓰시는 통로와 같다네.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 한 다면 앞 못 보는 소경과 같은 사람이야. 사람은 지혜 덕분에 칭송을 받고 근면 덕분에 재물을 쌓지.

하지만 그 지혜도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모든 사람이 자랑하는 노력도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고 뒷받침 해주신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은 우리가 누리고 사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분명하다네.

그것은 마치 걸인에게 1억 원을 주면 그것이 곧 그에게 음식과 의복 등 돈으로 살수 있다는 것을 다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비참함에서 건짐을 받음

  둘째로 하나님의 베푸신 이 모든 은덕 말고도 아래 세상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은 것들이 참 많아.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인애를 베푸신 것인지 알게 되지

이런 것 들은 현저히 눈에 뜨지는 않지만 아래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일이 아닐세. 희소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들이야.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간혹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오랜 질병과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 밖의 큰 재난에 내어 놓으실 필요를 느끼시는 일도 있지.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더 심한 죄의 오염에서 건지시고 몹시 찌들어 있는 못된 습관을 고쳐주시려는 사랑의 배려일세.

우리의 천부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죄의 지배에서 건지시기 위해 질병과 고통을 내리실 때는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게 죄책에 사로잡혀 있는 것보다 더 낫다고 여겨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고 안정하게 결론을 내려도 된다네.

하나님은 매우 지혜롭고 부지런한 의사이기 때문에 질병보다 더 못한 치료법을 사용하시는 법이 없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영할 때를 대비하여 경고를 하셨지 잘 살게 되면 이것저것 다 잊어버리고 그저 세상 즐거움에 정신이 팔리는 인간 본성대로 그들이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8: 17)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미리 단단히 타이르신 것일세.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신다네(8: 18)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베푸신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 경고가 너무나 절실하지.  


하나님의 사랑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주는지 깨닫게 하신다네.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살 때 하나님은 워낙 큰 영적 선물과 그로 말미암는 기쁨을 약속하신 까닭에 그 약속만 가지고도 큰 위로를 받고 남음이 있었지.

과연 그 약속은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신분에 합당하게 버릴 것을 요구한 일시적인

세상 낙들을 훨씬 능가하는 귀한 것이었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두운 눈이 감길 때(죄를 버릴 때) 오히려 가장 밝게 나타나게 돼. 영혼이 육신을 떠날 때 곁에 가장 가까이 있어줌으로써 이 복된 곳에 도착하는 영혼마다 옛적에 나오미가 보아스에게 했던 말이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만들지.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 20)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요일3: 2)이것이 내가 말하려는 주제라네.

우리가 이렇게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덕분이야.

천국은 어디를 가나 행복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에 이곳에 사는 우리는 천국이 행복의 장소라는 사실을 전혀 새삼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네.

세상의 여러 가지 낙에는 공허도 많이 따르지만 천국의 복락은 우리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지.

사도바울이 말한 그대로 일세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2: 9)

우리가 누리는 정결한 기쁨은 우리의 지각을 넘어설 뿐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만큼 지고하지.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무엇을 가장 완전한 행복인줄 알고 살았든 간에

이곳에서 누리는 경험은 우리의 기대를 크게 넘어선다네.

천국은 모든 결실이 다 기쁨에 기결되어서 아래 세상에서 실망하고 실수한 것조차

이곳에서는 행복을 증진시키지.

이곳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로서 성경에서조차 제대로 다 표현되지 못했어.

우리가 아래 세상에서 살 때 품었던 생각들이 씻겨질 뿐 아니라 그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숭고한 차원에 올려지지. 이곳에서 우리의 기능들이 적절하고 좋은 대상들을 맞이할 뿐 아니라 우리의 기능들 자체가 높아지고 확대되기도 한다네.

복을 받아 이 거룩한 장소에 들어오도록 허락된 사람들에게는 다른 여러 가지 유익 가운데서 이중의 유익이 베풀어 진다네.

첫째는 복된 영혼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새롭고 독특한 환경을 접하게 되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여러 가지 역량들이 확대되어 전에 알지 못하던

대상들도 알아보고 거기서 새롭고 더 큰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아래 세상에서는 천국의 복락이 마치 별들처럼 보이게 마련이지.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극히 작아 보이지만 아무리 작은 별이라도 땅에서

가장 큰 물체보다 아니 지구 자체보다 휠씬 더 크다네.

그러므로 에페네투스 자네가 여전히 사멸 성을 입고 있는 것을 고려하여 자네에게는

 초월적으로 보이는 천상의 것들을 자네가 사실대로 알도록 설명 해보겠네.  


소원들이 성취됨

  이곳에서 우리는 아래 세상에서 터득한 그릇된 개념들을 충분히 바로잡을 만큼 복을 누리고 있다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쁨을 일일이 열거하고 평가하는 법을 배우는데 그것이 다 합쳐져서 완전하고 영원히 참된 복락을 이루는 것일세 이곳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철학이 시도하려는 것과 같이 체념과 자족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큰 소원들이 온전히 성취되기 때문이지.

이곳에서 우리가 품은 소원은 잘못된 대상을 선택하는 일도 없고 성취되지 않는 일도 없다네.

소원이 어김 없이 올바른 데다 틀림없이 성취되거든. 성도들과의 사귐 안에서

이곳에서 우리는 아래 세상에서 그토록 흠모하던 복된 성도들을 만날 뿐 아니라, 그들처럼 되기까지 한다네.

성경이 말하는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12: 23)이 바로 그들이지.

이곳에서 우리는 그들을 항상 친밀히 접하며 그들의 복된 사귐에 환영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수를 늘리게도 하네. 또한 이곳에서는 아래 세상에서 온갖 고초와 몰이해를 당했을지라도 실은 인품이 너무나 훌륭하여 존경의 심정을 금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영들도 만난다네.


어린양 앞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곳에서 한번 뵈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는 분을 보고 살지.

그분은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네(13: 8)

성경이 그토록 힘써 전하는 그 영광스러운 구주께서 우리에게 우리를 위해 많은 일을 이루시고 큰 고난을 당하셨다네. 주님은 무한히 완전하신 점과 측량 할 수 없이 크고, 많은 유익을 끼치셨다는 점에서 우리의 진실한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시지.

주님께서는 아래 세상에 거하시는 동안 평생을 온전하고 본이 되는 인격을 발휘하시고 그 인품을 사모하는 자들을 부족하다 물리치지 않으시고 극히 온유하고 다정하게 대하셨지.

그러나 땅에서는 복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형체(2: 7)를 가지셨네

종의 형체를 가지신 목적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아래 세상에서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수행하시기 위함이었지. 그러나 우리는 그 분이  만 왕의 왕이여 만주의 주’(6: 15)로서 왕의 직분에 따른 왕의 지위와 상태에 계신 것을 본다네. 하늘과 땅의 권세가 그분에게 부여되었지(28: 18)  

주의 영광을 바라봄

  그분은 찬란한 엄 위와 광채에 둘러싸여 과연 우리가 가장 흠모한 광채에 둘러싸여 계셔서 과연 우리가 가장 흠모할 분임을 금방 알 수 있다네.

이곳에서는 기쁨에 겨운 우리 영혼들이 그분의 영광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묵상함으로써 솔로몬의 아가 서에 등장하는 신랑을 닮아야 할 이유를 더욱 많이 발견하기 때문이야.

솔로몬은 신성한 신랑의 극한 아름다움을 여러 면에서 상고한 끝에 그 모든 것이 사랑스럽구나’(5: 16)하고 찬탄했지.

복되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독생자 자기 백성을 위해 이루신 고난과 순종을 받으시고 그분의 택하심을 입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에게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영광을 즐거이 입혀주시지.

그토록 많은 당신의 종들에게 별과 같은 광채를 입혀 주신 분께서 의의 태양이신 아드님에게 휠씬 더 찬란한 광채를 입혀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물론 자네는 사멸적 상태를 벗지 못했으므로 그 영광의 광채를 직접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말일세.  


주님의 영접을 받음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이렇게 크고 영광스러우실지라도 두려워 범접하기 어렵지 않고 오히려 지극히 인자하시고 친절 하시다네. 승천하신 뒤에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지.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3: 20)

그리고 비유에서 우리의 복되신 주님을 상징하는 왕은 신실한 종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15: 21)하고 반기신다네

예수님이 계시기에 천국임

  내게 천국이 더욱 천국답게 되는 것은 아래 세상에서 나를 위해 그토록

많은 고난을 당하신 예수께서 이곳에서 다스리시기 때문이지.

그리고 우리 구주께서 누리고 계신 형언할 수 없이 큰 행복이 그분에 대한 우리 사랑의 열기에 따라 우리에게도 행복을 가중시킨다네.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우리가 맛보는 기쁨이 참 크지만 기쁨에 무슨 조건이나 상황이 굳이 필요 없다는 거야.

오히려 우리 구주께서 행복해 하시는 사실 자체가 그 분이 내리시는 후한 선물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뚜렷한 증거이기 때문에 우리 행복을 더욱 가증시키는 것이지.

박해를 당하던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 심을

기뻐했다네(5: 41) 그런데 이제 이곳에 와서 주님과 함께 거하니 그들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런 의미에서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 5)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함

  이곳에서 주님은 충성된 종들을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 가면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시지(25: 2)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시거나 그분의 기쁨을 우리에게 나눠주시는 것이 그분께서 항상 해 오신 자비의 일이라네.

주님은 몸소 고난을 당하시어 우리의 비참함을 덜어 주시거나 몸소 기쁨을 나눠주시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시는 것 일세.

이곳에서는 우리의 맏형이 되신 그리스도를 볼 뿐 아니라 아래 세상에서 그분을 경외하고 살다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숨을 거두었던 우리 친구들과 친족들도 만난다네 이 사실이 우리에게는 여간 큰 행복이 아니야.  


앞서간 성도들을 금방 알아봄

  주님께서 부활의 자녀들은 천사들과 같게 될 것(22: 30)이라고 하신 것처럼 천국의 영들은 아담, 엘리야, 바울 등 성경의 인물을 보면 누구라는 것이 금방 알게 되어 있다네.

변화 산상에서 세 제자가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금방 알아보았던 일은 이곳의 모든 성도가 서로 잘 알아보게 될 표상이라네  


완전한 연합

  이곳에서는 복된 자들이 하나님과 서로 간에 완전한 연합과 사귐 안에서 살고 있지.

지식이 없다면 사귐이 있을 수 없고 사귐이 없으면 행복이 있을 수 없다네.

이곳에서 우리가 서로 잘 모른다면 그 상태를 가르쳐 행복하다고 말하기란 어렵지.

이곳에서는 장자들의 총회’(12: 23)가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직접 뵙고 복을 누리는 까닭에 서로에 대해서도 그 순결한 사회를 하나로 연합시키는 지극히 순수한 기쁨과 거짓 없는 뜨거운 사랑을 주고 받는다네.  


완전한 사랑

  땅에서는 우리의 사랑이 친족의 관계나 그 밖의 사회적 유대 때문에 혹은 겉으로 훌륭하게 보이는 점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지.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랑의 동기도 훨씬 숭고하고 사랑의 정도도 땅에서와 비교할 수 없이 뜨겁다네.

이 초자연적 상태에서는 육체적인 유대 관계와 사랑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아.

바울 사도는 땅에 거할 때 조차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않았다고 했지(고 후5: 16)

우리의 영적인 관계는 아무리 강한 혈연적 유대보다 더 가깝고 항구적이지.

이곳에서 우리는 같은 하늘 아버지와 평강의 왕이시며 우리의 행복한 가정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네

아래 세상에도 지혜와 거룩과 선과 정절이 서로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며 혈육의 관계나 그 밖의 육체적 관계보다 더욱 친밀하게 영혼들을 결합시킨다네.

하지만 아래의 세상에서는 아무리 영적인 사랑일지라도 불순한 요소가 끼었다네.

훌륭한 위인들에게도 취약한 점과 흠이 있어서 그들에 대한 존경을 긁어 내리게 되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완전을 이루는데 필요한 모든 영광스러운 덕성들이 다 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이룬다네. 아래세상에서는 참된 은혜가 감각할 수 있는 행동으로 나타나지만 그 진정한 영광은 내면에 있다네.

이곳에서는 복 받은 이들의 탁월함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

거룩한 눈에 하나님을 닮은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게 보이겠는가!

나는 동료들이 불멸의 사랑으로 빛나는 모습에 항상 매료된다네.

그들의 사랑의 원인이 되신 분에 대한 보답이요 사랑을 받은 만큼 겉으로 드러나지.

이곳에서는 누구나 서로에게 온전히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네(133: 1)

사랑이라는 이 천상의 불에는 그만한 능력이 있는 것일세. 그 불에 닿으면 영혼들이 녹아 하나가 되고 온유와 친밀한 기쁨이 편만하여 마치 각 개인이 전체의 마음에 있고 전체가 각 개인의 마음에 있듯이 전체의 복이 사실상 각 개인의 복이 된다네.  


  
완전한 우정

  이와 같은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든 필요가 기쁨의 원인이 되지.

이 복된 사회에서는 서로를 귀히 여겨 사랑을 주고받는 일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네.

그들은 서로 주고받은 대화와 사귐에서 큰 힘과 기쁨을 얻게 되지.

아래세상에서도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나눈 대화에는 사랑과 기쁨이 있지 않았던가? 그들의 일치된 시각이 찬란한 영혼들로 구성된 고리처럼 그들의 영혼들을 하나로 단단히 결속시키지 않았던가?

아래 세상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끼어 있지 않은 사귐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소중한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래도 지순한 사랑이 담겨 있다네.

아래 세상의 우정에서 고귀한 것은 무엇이든 이곳에서는 완전하지.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연약함 때문에 생기는 불완전이 이곳에는 모두 제거된다네.

이곳에서는 복된 영혼들이 서로를 향해 넘치는 사랑과 배려를 가지고 각자 받은 은혜를 말하고 은혜의 삶을 시작하여 온갖 시험 가운데서 끝까지 은혜를 간직하고 지킬 수 있었던 비결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신 일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을 성취하고 이 기쁨에 참여하게 된 일을 회상하지.  


한 마음으로 찬송을 드림

  그들은 한 마음과 한 목소리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데 찬송의 내용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가장 낮은 등급의 피조물들로 지으실 수도 있었는데 이성을 지닌 사람으로 지어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도하고 누릴 수도 있게 해주신 일과 세상에서 자신들을 자비로 보살피시고 섭리로써 인도 해주신 일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존귀의 그릇들로 선택해주신 주권적인 독점적인 은혜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죄의 속박에서 구출해주신 강력한 은혜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값없이 모든 죄책에서 의롭다 하시고 이제는 영화롭게 해주신 은혜가 포함되어 있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기쁜 일에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그분의 영원한 자비를 높이고 감사 드린다네.  날개 달린 그룹들과 스랍 들도 보좌 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순결과 권능과 영광을 열정과 기쁨으로 찬양하지.

그들의 찬송이 얼마나 기막힌 화성을 이루는지 아래 세상에 있는 성도들도 그 찬송의 메아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도 그 찬송에 함유하고 싶은 소원이 뜨겁게 타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성경의 비밀들이 밝혀짐

  아래 세상의 내노라 하는 신학자들도 성경의 몇몇 부분들은 자신들이 사모하되

그 뜻을 가늠 할 길이 없노라고 부끄러워 않고 시인했지.

모든 대범한 비평가들과 주석 가들이 설명하려고 시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성경의 난해한 부분들을 이곳에서 나는 다 이해하는 큰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네.

하지만 아직 아래에서는 그 본문들을 해석되지 않은 채 비밀로 남아있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의 여러 부분들이 전지하신 저자께서 가장 정확하게

사용하시려고 시도하신 다양한 시간들과 인물들과 사건들에 얼마나 정교하게 들어 맞는지 아래 세상의 사람들은 식별할 길이 없기 때문일세.

아래세상에서는 훌륭한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세상 경영 방식에 자주 의문을 품었던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수수께끼들을 이곳에서 우리는 불을 보듯 명확하게 알게 되었지.

세상에서는 믿음을 지키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과 박해를 당하고

악인들은 항상 잘되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이지.

그러나 이곳처럼 일단 하나님의 세상 경륜이 다 드러나게 되면 아래 세상에서 사멸 자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모든 혁명과 제국과 가문 특정인의 출현이 그렇게 공 의롭고 필연적이고 시기 적절할 수 없었음이 밝혀지지.

우리가 땅에 거할 때 하나님을 부정하라고 유혹하던 부조리한 현실이 오히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자료가 된다네.

기막히게 탁월한 하나님의 섭리에 압도되어 할 말을 잊게 되지.  


신자가 세상에서 시험을 당하는 이유

  나는 땅에서 살 때 고통과 시련에 치이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너무 가혹하시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필연과 공의의 결과이고 심지어 자비의 손길 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네.

아래세상에서 나를 고통과 시련으로 몰아넣은 사건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부당하게 빨리 임했거나 부당하게 너무 무거웠거나 부당하게 너무 오래 지속 된 게 없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확실히 알게 되었어.  나는 시련 속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 소망이 내가 바라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안겨 주었다네.

게다가 시련이 나를 완전히 넘어뜨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내게 유익을 주는 쪽으로 작용했지(8: 28)

땅에서 무지하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지긋지긋한 어둠이 이제는 모두 사라졌지.

이곳에 처음 와서 밝고 영원한 날을 맞이한 순간부터 그랬다네.

땅에서 믿음을 연단할 뿐 아니라 무겁게 짓누르던 모든 환란이 이곳에 와서 씻은 듯이 사라졌어.

복된 영혼 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림

에페네투스 이제 말을 마무리 해야겠군. 이곳에서 우리는 성도들과 천사들과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운 하나님과도 대화를 나눈다네.

이곳에서 우리는 천국을 누릴 뿐 아니라 천국을 지으신 하나님을 그대로 뵙는다네.

이곳에서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분을 묵상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하는 생활에 몰입해 있지.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기쁨이 무한하고 무궁하다네.

이곳에서 우리가 아쉽게 느끼는 것이 있다면 복되신 하나님을 원 없이 찬송할 입술이 많았으면 하는 것과 우리에게 이처럼 큰 복을 주신데 대한 더 적절한 감사를 드릴 역량이 있으면 하는 것뿐 이라네.  


복된 영혼들은 완전한 행복을 맛봄

 이 복된 거처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을 소원하면 즉시 풍성하게 얻게 되지.

항상 변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새롭다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특징이라네.

이곳에서는 권태라는 것은 없다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지식을 끊임없이 배워 나간다네. 아래 세상의 낙이란 옷과 같아서 입을수록 빛도 바래고 닳지만 우리가 누리는 천상의 복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입었던 옷처럼 세월이 흘러도 닳거나 해어지는 법이 없지.

이곳에서는 복 받은 영혼들이 항상 처음인 것처럼 매 순간 설렘으로 기쁨을 맛본다네.

우리의 즐거움은 마음을 다른 데 빼앗기지 않고 차분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높고 크신 덕을 찬미할 때 더욱 귀하게 될 것이라네.

간단히 말하면 이곳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끝이 없고 광활하여서

그것을 온전히 맛보려면 영원의 세월이 필요 한데 바로 그 세월 안에 우리가 있지.

지금까지 자네에게 우리의 하늘 가나안 복지에 관해서 간략히 설명했네.

그것은 하고 싶은 말의 천분의 일도 되지 못하지만 이곳이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자네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할 것일세. 사멸적 육신을 내려놓는 날까지

믿음과 오래 참음’(6: 12)으로 기다리는 것이 이제 자네가 할 일일세.

믿음으로 참고 기다리면 나한테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겠지.

자네의 귀는 아직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보좌 앞에서 드리는 찬송을 듣기에 적합하지 않고 이곳에서 복된 영혼들이 끊임없이 드리는 찬송도 언제까지나 듣고 있을 수 없지.

물론 자네 귀가 다른 사멸 자보다 강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행복한 곳을 가득 채우는 찬란한 영광을 아직은 볼 수 없다네. 하지만 자네는 아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천상의 것들에 관해 갖고 있는 것 보다 휠씬 더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된 셈이지.

이것이 지극히 크고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인 까닭에 자네를 이곳에 오게 하신

하나님의 크고 넘치는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할 큰 이유가 있다네.” 하고 주니우스가 말했다. 에페네투스는 친구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서 자기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주니우스는 자네 어머니는 천국에 와 계신다고 하며 이 행복한 곳에서는 세상의 혈연관계가 종식되며 천국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모두가 천사들과 같을 뿐이라고 (22: 20) 영혼은 성별을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혈연관계가 다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자네가 아래에서 어머니라고 부르던 사람을 이곳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마치고 에페네투스의 손을 잡자마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순식간에 불멸의 옷을 입은 무수한 빛나는 형상들을 스쳐갔다. 그들은 자기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에페네투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에페네투스가 취약한 사멸 성이라는 누더기를 걸치고 천국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주니우스는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데려다 준 다음 잘 가게 이제 자네가 바라던 대로 다 해주었다네. 얼마 후면 자네를 안내했던 천사가 와서 아래세상으로 다시 데려다 줄 것일세. 그곳에 도착하면 하나님의 크고 기이한 사랑을 잊지 말고 감사하며 살길 바라네.

하나님께서 자네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육 적인 눈으로 물질이 아닌 복된 세계의 영광을 보도록 허락하신 거라네.”하고 친구는 떠나자 에페네투스의 어머니가 나타났는데 어머니의 용모가 너무나 영광스러워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였던 사실에 용기를 내어 인사를 드렸다.

사랑하는 어머니 이 빛과 불멸의 복된 곳의 거민 들처럼 

찬란한 옷을 입고 계신 모습을 보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다

 사랑하는 에페네투스 지금 나를 인해서는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에게 모든 찬송과 영광을 드림이 마땅하다.

하나님 홀로 나를 이렇게 만드셨다. 네 눈에 보이는 이 영광스러운 의복은 하나님의 찬란한 광채를 반사하는 것뿐이다.

만약 복된 예수께서 먼저 내게 당신의 의의 옷을 입혀주시지 않았다면 이 영광스러운 옷을 입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위험을 헤치고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영혼을 영광으로 인도 하는가!

한때 나는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자로서(3: 17) 나 자신의 역겨운 상태에 갇혀서 더러운 혈기 속에서 부패해 갔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풍성한 사랑으로 나를 그 비참하고 슬픈 처지에서 건져주셨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씻어주시고 내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한때 나는 어두움 그 자체였으나 기적적이고 행복한 변화에 힘입어 이제는 빛과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다. 나는 한때 가난하고 비천했으나 이제는 하늘이 줄 수 있는 혹은 내가 받을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한때 나는 벌거벗었고 수치에 노출되었으나 이제는 빛과 영광의 옷을 입고 있다. 한때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단절되는 형벌아래 있었으니 이제는 나의 유일한 생명과 기쁨의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던 밤을 보내고 맞이하는 새날의 광명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가!

과거의 악들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지금의 행복을 얼마나 더 가슴 뿌듯하게 만드는가!

이것이 내가 승리의 구주께 드리는 할렐루야 찬송을 갈수록 더 기쁘게 조화롭게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기이한 점들이 앞으로 영원히 우리의 찬송 제목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때 내가 너의 어머니이긴 했으나 이곳에서는 나를 어머니라 부르면 안 된다.

 이곳에서는 그런 모든 혈연관계가 그치고 모두가 홀로 이 거대한 천국 가족의 크신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 귀속된다.

네게 분명히 말해둘 것이 있다. 너는 내 몸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보다는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나와 휠씬 더 가깝다.

믿음을 통해서 너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우리 행복의 근원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자비이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행복은 모든 점에서 우리의 극대화된 역량들에 너무나 잘 부합한 그 분 안에 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온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묻거나 생각할 수 있다.”(3: 20)고 했다.

에페네투스는 어머니에게 아래세상에서 그가 가족을 떠나 이곳 천국으로 인도받은 경위를 말해주어도 되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그의 어머니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육체를 벗어버렸으므로 육체로 맺었던 모든 관계들도 모두 버렸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다 이제 내게 남편이 없고 다만 내 영혼의 복되신 신랑 되신 주님만 계 실뿐이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들보다 준수 하시며 홀로 나의 사모하는 분이신 까닭에 이곳에서 나는 다른 관계를 일체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한 분 아버지의 자녀들이며 한 분 주인의 종들이다 그 주인을 마음을 다해 섬기는 것이 우리의 온전한 자유이다.

아래 세상에 남겨두고 온 이들에 관해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뢰했으므로 나는 마음이 행복하다.

세상에 남은 나의 가족들이 구원을 가로막는 불구대천의 원수의 진영에 가담하여 자기들에게 제시된 은혜를 거절하고 그로써 불신앙 속에서 멸망을 자초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의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나 또한 그 사항에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것이다.

너는 아래 세상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부디 내려가서 그들을 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노력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에 대한 훌륭한 증거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네가 육신을 입고 이곳을 방문하는 독특한 특권을 얻은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순교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에페네투스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많은 무리가 그들 곁을 지나갔는데 모두들 어떠한 수식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순결한 아침 햇살 같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 10)

천사들로 보이는 또 다른 무리들을 보았는데 지극히 영광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고 저마다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앞서 가던 무리의 노래를 받아 이러한 노래를 불렀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찌로다(7: 12)

희고 순결한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든 그 거대한 무리가 누구인지 그는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는데 그들은 고결한 순교자들의 무리라고 대답하시면서 그들이 세상에서 큰 환란을 견디고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다가 이제는 옷을 어린양의 피에 빨아 입고 승리의 상징인 종려가지를 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7: 9,1 3, 14) 그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고 물어보았더니 그들이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6: 10) 하고 간구하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에페네투스는 저는 이곳에 와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고 있으므로 동료 피조물들에 대해 복수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품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더욱 굳혔던 이유는 이곳의 영혼들이 아래 세상에 있을 때 자기들을 박해하던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되 심지어 화형 대에 묶여 사형 집행인들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을 때조차 그런 기도를 드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온유하게 용서를 빌던 그들이 천국인 이곳에 와서 저렇게 변하다니 이상하게만 여겨집니다.”하고 말하자 그 어머니는 이곳의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온전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바쳤기 때문에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에게 고난을 안겨주었던 자들에게 환난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인줄 알고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한 적그리스도 음녀에게 심판을 내리심으로써 당신을 영화롭게 하실 계획을 세워두신 것을 아는 그들로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음녀를 심판하시는 결과로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을 안다.

바벨론이 무너질 때도 그들의 입으로는 새로운 찬송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때에 성도들은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18: 20)

과연 그때에는 모든 성도가 이렇게 찬송할 것이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19: 1-2)

그러므로 모든 종들과 무론 대소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이 우리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제단 아래서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6: 10)하고 부르짖은 것은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심판으로 영화롭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에서 나온 것이다.”하고 말했다.


복된 영혼들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을까?   그는 이번에는 천국의 복된 영혼들이 아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있는지 과연 그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곳에서 우리는 가지고 있는 지식의 종합은 우리의 모든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이다. 아래세상의 특정인들의 일에 관해서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거니와 아는 바도 없다.

우리는 비록 영화롭게 된 피조물들이긴 하나 여전히 유한한 존재들이다. 모든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만물을 다 내려다보시는 하나님만 지니시는 독특한 덕성이다.

아래 세상의 교회가 승승장구하는지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에 관해서는 구원의 후사가 될 자들을 돕도록 보내심을 받은 섬기는 영들인 천사들(1: 14)이 우리에게 와서 알려준다. 천사들에게 소식을 듣고서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양께 영원히 찬송을 드릴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당신의 교회를 건지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우리에게 가장 큰 묵상 자료이다.

우리는 뜨거운 사랑을 품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백성의 행복이 온 교회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안전케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은 신부가 자신을 단장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이 완성 되었을 때에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다.


복된 영혼들은 천국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에페네투스는 자기를 안내할 천사가 올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어머니에게 질문을 했다.

복된 영혼들이 이 복된 장소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며 주로 무슨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네가 여전히 입고 있는 사멸성의 옷이 이 광명한 곳에서까지 네 이성을 얼마나 두껍게 덮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마치 우리가 여전히 죽을 육체를 입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이곳에서는 사멸 성이 생명에게 삼킨바’(고 후5: 4) 된 것을 생각지 않는구나

이곳에서는 시간이 연속이나 끝이 없는 영원 속으로 들어와 있다.

물론 아래 세상에는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사람들은 그것을 시각과 날과 주와 달과 해로 구분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낮과 구별할 만한 밤이 없고 해와 여러 계절로 구분하는 주기 같은 것도 없다.

이곳에서는 하나의 영원하고 나뉘지 않는 시점이 언제까지든 지속될 뿐이다.

그러므로 에페네투스, 이곳에서는 시간을 보낸다는 개념이 없다.  


복된 영혼들에 관한 대화

 네 질문의 두 번째 부분 즉 우리가 대개 어떤 대화를 나누고 사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원의 세월 속에서 해야 할 일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 일이 너무나 마음에 맞고 즐거워서 하면 할수록 기쁨이 늘어만 간다.

영혼에게 지식보다 더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 어디 있겠니?

이쯤 되면 우리가 이곳에서 개척해야 할 분야가 얼마나 광활한지 너도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식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것을 내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정서도 증가한다.

이곳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든 성삼위 하나님을 높이 찬송하고 앙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이 이곳에서 우리가 특별히 누리는 행복이다.

아래세상의 만물의 이치, 예를 들면 씨앗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자석에 철이 끌어 당기고 호박이 지푸라기를 집어 올리는 미스터리 앞에서 사멸 자들은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없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 조차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 은밀한 내막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것 들을 이곳에서는 알 수 있으며 그 은밀한 원인들이 우리 눈앞에 밝히 나타나 있어서 그것 역시 우리를 지극히 겸손하게 만들어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광대’(28: 29)하신 분을 다시금 찬송하게 한다.

또한 천체의 엄청난 규모와 기이한 조성도 아래 세상의 천문학자들이 원인과 결과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듯이 행세 하지만 이곳의 복된 영혼들은 소상히 배워 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들로 인하여 큰 찬송을 드린다. 우리는 단순히 직관만 사용하여 이런 지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분석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여 지식을 더울 쌓아간다 물론 직관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래 세상이었다면 오랜 세월에 걸쳐 차차 알 수 있을 한 일도 이곳에서는 한번 바라보아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속히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도 직관에 적지 않게 도움을 된다.

그러나 지식을 얻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의 역사와 그분이 만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기이한 지혜가 이곳의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묵상의 주제가 된다.

사물을 보고 깨달을수록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는 크신 분의 영화로운 이름을 드높이게 된다. 나는 아래 세상에서 살 때는 허영이 마음을 덮고 있어서 사물을 바라봐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다 놓치고 흐릿하게 밖에 볼 수 없었지.

멀리 있는 것은 아예 볼 엄두도 내지 못했고 그러나 이젠 지적 기능들이 확대되고 온전해져서 과거에는 잠시 불완전 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원만하게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모르겠다.

아래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에 갇혀서 그 안에서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현재 우리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위대하신 창조주의 지혜를 드높이지 않을 수 없다. 아래 세상의 사람들은 자기 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런 모든 일들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주관하셔서 오래 전에 작정하신 바를 이루시되 그 일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자들이 정작 본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는 것을 볼 때 과연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8: 29)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복 받은 모든 이들이 기이한 은혜로 자신들의 영광에 이르게 해주신 하나님께 영원히 찬송을 드린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걸음을 막지 않으셨다면 스스로 몸을 내던졌을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를 밝히 바라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멸망을 향해 가지 못하도록 자주 길에 가시덤불을 쌓아두셨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다양한 방법을 환히 반추해 보면서 목소리를 합하여 큰 찬양을 드린다.

우리가 찬송을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를 햇살처럼 우리에게 비추셔서 우리로 더욱 당신을 닮게 하시는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에페네투스 이렇게 해서 네 마지막 질문에 대답해준 셈인데 훗날 불멸을 입고서 이곳에 다시오면 모든 것을 휠씬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네가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행하거라(4: 1)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거라.

이곳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은 너 자신의 약함을 더욱 직시하게 하여 자신을 의지하지 않게 하는 효과를 낼 것이다.

너처럼 한때 이곳에 왔던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 바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육체의 가시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받은 풍성한 계시로 너무 자고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후12: 7)

그러므로 그를 본받아 겸손한 마음을 잃지 말거라 겸손이 너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멸시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은 높이신다.  


어머니가 떠나다.

저기 너를 안내할 천사가 오는구나. 이제 네가 이곳에 다시 오는 날을 기약하고 작별을 해야겠다.

그날이 오면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지.” 하며 그 말을 마치자 홀연히 떠나셨다

그러자 그를 아래 세상에서 데려온 찬란한 천사가 그 앞에 와 있었다. 그가 천사에게 절을 하려고 하자 천사는 절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서 하는 것이지 나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너의 동료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그분 홀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며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두움의 왕이 다스리는 지대로 안내해주겠다고 하며 그곳에 가면 죄의 값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준엄한 공의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좌 위로 올라서려 했던 자들의 반역에 대해 어떤 심판을 예비해 놓으셨는지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에페네투스가 어둠의 세계로 내려가는 길에 수많은 별들을 보자 그 별 하나하나에

아래 세상처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인지 묻자 천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내기를 기뻐하신 일은 우리가 알고 그렇게 나타내시지 않은 일은 하나님만의 영원한 섭리에 비밀로 닫혀 있다고 하고 피조물들이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는 것은 무모한 주제넘은 호기심이라고 하며 그 내용을 아직 계시하신 바가 없으며 그 점에 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했다.  


지옥의 언저리

 에페네투스는 공중의 가장 낮은 지대로 내려가는 동안 두려운 형상들과 음침하고 어두운 모양들이 찬란한 천사를 보고 도망치는 것을 보았다.

천사는 저들은 공중과 땅을 오르내리면서 우는 사자들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 다니는 타락한 영들이라고(벧전5:8)하며 이곳에서 도망쳐 날아갔지만 머지않아 어둠의 영역에서 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인데 지금 에페네투스와 천사가 와 있는 곳은 지옥 구덩이의 경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2
부 지옥과 멸망 자들의 고통을 목격하다

1장 지옥의 비참한 상태/영혼들의 참혹한 고함소리

 밤보다 휠씬 더 짙은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던 것이다. 불붙은 유황보다 훨씬 더 독한 매연이 코를 찔렀다. 귀도 저주받은 영혼들이 내지르는 참혹한 고함 소리에 멍멍했다.

지상이 아무리 아비 규한이라 할지라도 이제 잠깐 겪기 시작한 이 상황과 비교할 때 차라리 듣기 좋은 음악이었다.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지옥의 변경에 와 있다 멸망 자(the Destoyer, 마귀)의 힘을 무서워 말라.

이미 내가 하나님의 권좌로부터 받은 위임장이 너를 위험에서 건져줄 것이다.

 이곳에서는 악귀들과 저주받은 영혼들한테서 이런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까닭을 들을 수 있다. 그들에게 묻고자 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들이 네게 대답해줄 것이다.

악귀들이 너를 해치고 싶어도 나를 이곳에 보내신 분이 그들을 단단히 결박해 놓았으므로(유다 서6, 24: 21-22, 벧후2: 4))

해치지 못한다. 그들은 감각을 느끼기 때문에 분노에 떨고 안달하고 고함을 지르고 혐오스러운 사슬을 물어뜯으나 모두 허사이다.”  


권 자에 앉은 루시퍼

이렇게 해서 우리는 깊은 동굴에 자리잡은 지옥의 영역에 들어오게 되었다.

연기 자욱한 용암 못에는 루시퍼(마귀)가 하늘의 확정된 명령의 사슬로 단단히 결박 당한 채 화염권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사나운 눈에는 지독한 고통과 사무치는 원한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옥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우리가 천국에서 이곳으로 내려왔을 때 우리를 보고서 도망쳤던 유랑하는 악귀들이 황급히 먼저 달려와 우리의 도착한 사실을 알린 상태였다.

지옥 전체가 괴성으로 진동했는데 이는 루시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악을 쓰며 토해내는 참람한 말 때문이다.

그의 말투에 교만한 자부심이 가득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 분노도 악의도 아닌 권력뿐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루시퍼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는 나의 하늘을 차지하고 내가 쥐고 있어야 할 찬란한 홀을 쥐고 있다.

그가 나를 죽음과 슬픔과 저주로 가득 찬 이 흑 암의 집, 내가 당연히 상속받아야 할

 빛이 사라지는 법이 없는 들판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가둬놓았다.

그런데 뭐라고? 그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옥마저 내게서 빼앗아 이곳에서 나를 모욕하겠다는 건가?  한번만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하늘을 뒤엎고 그의 찬란한

권 좌를 산산조각 내고 말 것이다.  혹시 다시 한번 패하여 그가 나를 이곳보다 더 뜨거운 불 속에 던져 넣는다 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내 잘못이 아니었다. 하늘의 아치 지붕 밑에 거하는 날개 달린 영들 가운데 나만큼 공정하게 승리를 추구한 자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패하여 영원한 멸망의 선고를 받고는 이 캄캄한 곳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하지만 인류가 나의 저주의 손아귀에 들어올 것을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된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에게 내 분노를 퍼부을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배나 쏟아 부을 것이다.

그의 참람한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 에페네투스는 안내하는 천사에게 저의 참람함이 얼마나 공정한 보응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천사는 네가 이 배교한 영에게 들은 것은 그의 죄이기도 하고 형벌이기도 하다.

 그가 하늘을 향해 참람한 말을 쏟아 낼수록 지옥의 온도가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이다.”하고 말했다.


멸망 당한 자들과 나눈 대화

  에페네투스와 천사는 그 자리를 떠나 좀더 가다가 처참한 슬픔이 무겁게 내리 누르는 곳에서 악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가련한 두 영혼을 만났다.

악귀는 두 영혼이 펄펄 끓는 불 못에서 기어 나오는 즉시 그들을 다시 불 못으로 집어 던졌으며 두 영혼은 서로 아귀다툼을 하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한 영혼이 고통을 당하는 동료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같은 저주받은 얼굴을 날마다 쳐다봐야 하다니!   가뜩이나 고통스러워 죽겠는데 너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

너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으니 너는 무척 고소하겠지 네가 나를 유혹하고 올 무를 놓았다.

네 탐욕과 질투와 속임 그리고 가난한자들을 학대한 일이 나를 이곳으로 오게 했다.

만약 네가 나를 위해 선한 본을 보여주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천국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텐데.

! 내가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인가!

너를 따라 가다가 그만 이 혐오스러운 곳에서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되었구나!

아예 네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니 네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내 영혼이

이런 가련한 운명에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말을 듣고 있던 상대방이 이렇게 맞받아쳤다.

  “나라고 너를 저주하지 못하겠는가! 그때 그 장소에서 네가 나를 유혹하여 끌어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때 너는 합법적인 일을 하고 있던 나를 꾀어내 너를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지? 네가 나를 꾀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너한테도 적지 않은 잘못이 있다.

나는 탐욕이 있었고 너는 교만했지 네가 나한테 탐욕을 배운 것처럼 나는 너에게 교만과 술버릇을 배웠다고 장담한다.

너는 나에게 속임수를 배웠고 나는 너에게 오입질과 거짓 말과 선을 비웃는 태도를 배웠다.

이처럼 나는 몇 가지 일로 너를 넘어지게 했고 너는 다른 면에서 나를 넘어지게 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비난한다면 나도 너 못지않게 너를 비난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너를 불결한 행동들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면 너 역시 나의 그런 행동들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네 몰골만 봐도 세상에서 짓던 죄가 새록새록 생각 나서 영혼에 깊은 상처가 생긴다. 나는 너와 함께 죄를 지었다. ! 가련한 내 영혼이여! 그곳에서 너와 사귀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너와 함께 지내는 불행을 면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비참한 대화를 들으면서 세상에서 함께 죄를 짓는 자들이 지옥에서도 함께 형벌을 당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으며 서로 사랑할지라도 지옥에서는 서로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에게 각별히 고통의 장소에 올 수 없도록 마음을 쓰는 진정한 까닭은(16: 19-31) 그의 동기는 형제들의 배려가 아니라 이기심에 있었다.  형제들이 자기 있는 곳에 오게 되면 그들로 인해 고통이 훨씬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 의로운 형벌

 더욱 처참한 광경들이 있었다. 어떤 여자 영혼은 악귀의 강압으로 활활 타는 유황을 입으로 삼켜야 했다.

워낙 잔인하고 강압적인 태도로 영혼을 괴롭히는 악귀를 보고 있자니 에페네투스는 저절로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왜 저주받은 비참한 영혼에게 뜨거운 지옥을 마시게 하면서 그렇게 기뻐하는가? 하고 에페네투스가 묻자 악귀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공의의 응징일 뿐이다. 이 여자는 생시에 많은 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한 구두쇠였다. 그래서 지금 이 여자의 입에 금을 부어 넣고 있는 것이다.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돈이 있으면서도 쓰는 것이 아까워서 겨우 끼니만 잇고 살았다.

불룩한 돈가방을 곁에 두고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지내거나 다른 사람이 내는 돈으로 허기를 면한 때가 많았다.

의복은 닳는 일이 없거나 혹은 닳더라도 늘 기워 입어서 나중에는 원 옷감을 찾아내는 것이 지식인들이 나일강 수원을 찾아내는 일만큼이나 어렵게 되었다.  

 이 여자는 세금이 무서워서 집도 없이 살았다. 강도를 만날 까봐 돈을 들고 다니지 못했고 자신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남을 속여서 재산을 부리면서도 사기를 당할 까봐 남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지도 못했다.

제 몸에서 음식을 빼앗고 제 영혼에서 자비를 강탈했으니 얼마나 지독한 사기꾼이었던 셈인가!

이 저주 받은 영혼은 세상에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라곤 딸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딸도 돈 쓰기를 무서워했다. 이렇게 땅에서 금을 신으로 모셨으니 지옥에서도 그것을 가득 먹여 주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

그녀를 괴롭히던 악귀가 말을 마치자 그 여자에게 그 말이 사실인가하고 에페네투스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여자는 그 악귀가 자기에게 먹이는 것은 금이 아니라 악취가 진동하는 유황인데 내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금을 이곳에 가지고 왔다면 이곳에서 행복 할 것 이라고 하며 만약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금이 내 손에 있다면 천국에 뇌물을 바쳐 당장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 했다.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재물을 그토록 우상처럼 여기는 모습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러자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이 광경을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사실을 더욱 깨닫게 될 것이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영혼은 영원히 망하게 된다 죄를 사랑하도록 버림받는 것만큼 무서운 형벌이 없다.  이 저주받은 영혼이 돈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있는 것이야말로 배교한 영들이 그녀에게 가하는 고통보다 더 두려운 형벌이다.”

에페네투스가 만약 땅에서 죄를 짓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이 지옥의 저주받은 영혼들이 공포에 질려 내지르는 비명을 들을 수 있다면 다시 죄를 사랑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말하자 천사는 영원한 진리의 말씀에는 세상에서 진리를 전하는 사역 자들의 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거나 듣지 않는다면 혹시 지옥에서 돌아와 경고해도 귀담아 듣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16: 31)  


끊임없이 죽음의 고통을 당함

  그곳을 떠나 얼마 가지 못한 지점에서 뜨겁게 달군 철 침대에 눕혀져 유황에 질식된 비참한 영혼을 보았다. 그는 공포에 질려 이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 무섭도록 비참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니! 영원이란 단어가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백만 년의 세월도 이 고통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다.

이 고통을 면할 수만 있다면 한 순간과 백만 번의 세상과 기꺼이 바꿀 마음도 있는데!

! 하지만 이 고통은 끝나는 날이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어디에 있을까! 영원이야말로 지옥 중에 지옥이 아닌가

이 저주받은 영원히 저주받은 고통이여! 내가 얼마나 고의적으로 자멸의 길을 걸었던가!

죄의 짧고 찰라 적인 쾌락을 택하고서 영원한 고통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르게 되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큰 죄를 지은 것인가 죄를 버리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얼마나 숱하게 받았던가!

죄의 길은 영원한 죽음의 방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 길을 버려야 한다고 얼마나 자주 경책을 당했던가! 그러나 귀먹은 독사가 자기를 부리는 자의 소리를 듣지 않듯이 나도 그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쾌락은 잠시요 그 후에는 곧 영원한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그들이 내게 얼마나 자주 타일렀나.

이제 이 모든 고생을 하면서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뼛속 깊이 절감한다. 이젠 확연히 알았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이젠 나의 영원한 상태가 영원히 고착되어 버렸다 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을까?

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을까!

태만과 무관심이 나를 찔러 죽이는데 하지만 만 번의 죽음보다도 고통스러운 임종의 삶을 스스로 끊을 수도 없고 끊어서도 안되고 그냥 살아야 한다.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우습게 여겼다.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구나. 행복하게 될 수도 있었는데!

구원의 기회가 내 앞에 주어졌는데 그것을 차버리고 말았다.

 그냥 한번만 차버렸다면 용서 받지 못할 미련한 짓이 아니었을 텐데 수 천 번의 기회가 찾아왔었는데도 번번이 차버렸구나!

, 저주받을 자여! 너는 속임의 독이 묻은 쾌락으로 인류를 영원한 파멸로 호리는구나!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부르셨는데 나는 부르시는 족족 거절했다손을 내미셨는데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의 섭리를 얼마나 숱하게 무시 해버렸던가! 하나님의 책망을 숱하게 뿌리쳤던가! 하지만 이제 무대가 바뀌었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젠 전능자께서 내 재앙을 보고 웃으시며 내게 닥친 파멸을 보고 조소하신다.

한 때는 나를 도우려고 하셨는데 그때는 내가 마음을 닫아걸었다.

그러므로 내가 선고 받은 이 영원한 고통은 내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응이다.” 하는 그 저주받은 영혼의 소리를 듣고 에페네투스의 양심은 자기도 저 비참한 영혼과 다를 바 없는 영원한 진노의 대상 이었는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구나 하고 복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찬양을 했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영혼에게 혹시 자기에게 속을 털어놓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면 말하라고 하자 그 저주 받은 영혼은 이렇게 말했다.  “고통을 덜 수 있는 길이란 없소. 내 고통은 경감이 허용되지 않는 아니 한 순간도 쉴 수 있는 것이 아니오

 하지만 내게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이곳 사람이 아니라 객이로군요.

아마 그런 것 같소. 내게 아직 지푸라기 하나만한 소망이 남아 있다면 이곳에서 건져 내달라고 영원히 무릎을 끓고 부르짖겠소만 이젠 모든 것이 허사라오. 나는 영원히 멸망을 당했소.

하지만 당신도 이곳에 와서 내 꼴이 되지 않도록 이곳에서 멸망 당한 자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 말해 주리다.


멸망 당한 자들이 상실한 것

이 지옥의 어두운 동굴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두 가지라오.

이미 상실해버린 것과 지금 겪고 있는 것 이 두 가지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해주겠소.

비참한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 자체가 내겐 더 큰 고통이겠지만.  


하나님의 임 재

고통과 슬픔으로 덮인 이 어둡고 비참한 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을 뵐 기회를 상실했소. 이 사실이 이 지하 감옥을 지옥으로 만드는 거요.

우리가 수 천 개의 세상을 상실했더라도 이렇게 상실감이 크지는 않았을 거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아주 희미하게 라도 이곳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뛸 듯이 행복하겠소만 우리는 그런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영원히 슬픔에 떨어진 것이오.


성도들과 천사들과의 사귐

이곳에서 우리는 성도들과 천사들의 무리도 상실했소.

그 대신에 우리 곁에는 고문을 가하는 악귀들만 있을 뿐이요.  


천국

이곳에서 우리는 복락의 장소인 천국도 상실했소.

우리와 천국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어서 영원히 그 곳과 차단되어 있소.

복된 자들을 행복으로 맞아들이는 영원한 문들이 이곳의 우리에게는 영원히 닫혀 있소.

 동정이 없는 곳

이곳에서 우리는 모든 동정을 전혀 받을 수 없소 고통 당하는 우리에게 이것은 너무나 큰 절망이지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토록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는데 이제는 긍휼을 거두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셨는데 이제는 긍휼을 거두시고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기쁘게 여기시되 영원히 그리하실 것을 생각하니 더욱 절망스러운 것이오.

하나님을 잃는다는 것만큼 더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성도들과 천사들도 우리를 동정하지 않는다오.

오히려 우리가 이곳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울부짖고 있는 동안 성도들도 우리가 멸망 당한 것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고 계신다오. 우리의 죄의 참담한 결과가 바로 이런 것임을 잊지 마시오.  


소망과 도움

우리의 비참함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좀 더 나은 상태로 올라갈 수 있다는 소망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것이오.

그것이 우리의 상태를 정말로 절망적으로 만든다오.

땅에서는 아무리 비참하고 가련한 처지에 떨어져도 일말의 소망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소망이 사라지면 마음이 무너진다는 속담도 생긴 게 아니겠소.

이곳의 우리는 소망도 도움도 없으니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게 당연하오.  


멸망 당한 자들이 당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상실한 것이오 이것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가슴을 쥐어뜯고 이를 갈게 되오,

그런데 이것으로 그치면 얼마나 좋겠소!

불행하게도 우리는 상실의 고통뿐 아니라 감각적인 고통으로까지 시달린다오.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말했으니 이젠 우리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말하겠소.  


형언할 수 없는 고통

  먼저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다오. 이곳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그 종류가 천 개 아니 만개도 더 된다오. 땅에서는 어지간해서 한 번에 한 가지 이상의 질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드물지요.

 그런데 만약 전염병과 통풍과 결석 증과 열병을 한꺼번에 앓게 된다면 스스로 얼마나 비참하게 느끼겠소?

이곳에서는 우리를 태우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고 숨이 꽉 막히게 하는 펄펄 끊는 유황 못이 있고 우리를 결박하는 영원한 사슬이 있고 공포로 짓누르는 철저한 흑 암이 있고 우리를 영원히 갉아먹는 양심의 구더기가 있소.

이것들 가운데 한 가지라도 인류가 땅에서 느끼는 고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클 것이요.  


한 번에 당하는 여러 가지 고통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서 당하는 고통은 가지 수만 많을 뿐 아니라 총체적인 것이기도 해서 몸의 각 부분에 온 영혼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통을 가하는데 그것이 너무나 견디기 힘들다오.

땅에서는 병에 걸리면 아픈 부위도 있지만 아프지 않은 부위도 있지요.

몸은 아픈데 머리는 멀쩡할 수가 있고 머리는 아픈데 중요한 장기들은 건강할 수가 있고 장기들에 탈이 났어도 팔다리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않소?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가 않다오 영혼과 육체의 각 부분이 한꺼번에 아픈 것이요.

눈은 너무나 어둡고 공포스러운 형상으로 다가오는 악 귀들의 모습에 고통을 당하고 귀는 멸망 당한 자들이 쉴새 없이 내지르는 비명과 절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코를 찌를듯한 유황 연기에 시달리고 혀는 뜨거운 유황 용액에 끊임없이 데이고 전신은 불 못에서 종일 뒹굴어야 한다오영혼의 모든 역량과 기능도 고통을 당한다오.

상상력은 지금 당하는 고통을 생각하느라 기억력은 우리가 천국을 상실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놓친 것을 떠올리느라 고통을 당한다오.

정신은 우리가 땅 위에서 얼마나 귀중한 세월을 악한 생활에 허비했는가 하는 생각에 시달린다오.

오성(오감)은 과거의 쾌락과 현재의 고통과 영원히 계속될 장래의 슬픔을 생각하고서 고통을 당하며 양심은 쉴새 없이 영혼을 갉아먹는 벌레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오,  


지속적인 고통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또 한 가지 요소는 이 고통이 지속적이기까지 한 것이지요.

다양하고 총체적이고 극단적인 고통이 지속적이기까지 한 것이지요.

잠깐이라도 쉴 수 있다면 한숨을 돌리겠는데 그런 것이 없소그 단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고통인 것이오. 고통이 조금이라도 완화되는 순간이 있다면 적지 않은 위로가 되겠는데 한 순간도 중단됨 없이 언제까지나 지속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을 너무나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이오지금 당하는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오.

 이 현실이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고 이 증오심이 우리를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오.


서로에게 가하는 고통

  우리가 이곳에서 속해 있는 사회나 사귐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또 다른 요소라오.

고통을 가하는 악귀들과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이 모두 하나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존재들이지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잔뜩 겁에 질린 비명과 절규.

그리고 우리를 이곳에 들어오게 하신 분에 대한 참람한 말을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전부라오.

그리고 이곳에 서는 동료 영혼들도 똑같은 고통을 당한다는 사실이 조금도 위안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요.


고통의 장소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장소 역시 우리의 고통을 더 깊게 만든다오.

감옥 지하 감옥 무 저 갱 불 못과 유황 영원히 식지 않는 용광로

영원히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지옥 그 자체 과연 이곳은 모든 고통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오.  


짐승만도 못한 고문 자들

  냉혈한들인 고문 자들이 우리의 괴로움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오

고문 자들은 마귀의 추종자들인 악귀들인데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은 아무런 가책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데서 즐거움을 얻소.  


영원한 고통

  지금까지 내가 열거한 구체적인 사항들만으로도 너무나 절망적이지만 더욱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 된다는 사실이오.

영원히 하나님의 공 의로운 진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 줄 당신은 모를 거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25: 41)라고 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항상 내 귀에 쟁쟁하오.

그 치명적인 선고를 되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할 텐데! 하지만 전능자의 권능이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가하고 계신다오.

영원히 당해야 할 이 고통을 어찌 다 당해야 할지 막막하나 그것이 내가 견뎌야 할 몫이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처하게 된 비참한 처지라오.”

이 가련한 영혼이 말을 채 마무리하기도 전에 지옥의 악귀가 다가와 불평해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니 이제 입을 다물라고 다그치면서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고문 자는 멸망 당한 자를 다음과 같이 몰아세웠다.

너는 너 자신이 이모든 고통을 당해도 싸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땅에서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숱한 경고를 들었으면서도 믿지 않았지?

오히려 지옥의 관해 말해주는 자들을 비웃었다 너는 전능하신 공의를 향해 멸망 시킬 테면 멸망시키라는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 멸망시켜 달라고 얼마나 많이 요청했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는 소원대로 된 것을 불쾌해 한단 말인가?  

자청하던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인데 그것을 불쾌해한단 말인가?

네 스스로 인정하듯이 너는 구원의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런데 무슨 낯짝으로 멸망 당한 걸 불평하는 것인가?

불평을 하자고 하면 나도 너 보다 억울한 것이 더 많다.

너는 기회라도 많았지만 나는 죄를 짓는 그 순간에 지옥 행을 선고 받았다.

네게는 수없이 구원과 용서와 사죄의 기회가 있었으나 나는 한번도 자비의 제안을 받아 본적이 없다. 죄를 짓는 그 즉시로 영원한 형벌을 선고 받고 말았다.

만약 단 한번 이라도 구원의 제안을 받았다면 너처럼 경솔히 그 기회를 넘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나처럼 구원의 제안을 받지 못했다면 더 좋을 뻔했다

고통을 견디기가 그만큼 쉬웠을 테니 말이다. 천국을 마다하고 멸망을 택한 너를 이제 누가 불쌍히 여겨주겠느냐?” 비참한 영혼은 이 말을 듣더니 이렇게 울부짖었다. “! 이제 제발 나를 고문하지 말라!

이렇게 멸망 당한 게 모두 내 탓 인줄 잘 알고 있다 , 그것을 잊을 수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도 있었다는 생각이 내게 가장 큰 병이다나는 멸망을 당했고 이것이 정당한 처분이다.”  그리고 자신을 고문하는 악귀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주받은 악귀야, 하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다 네 유혹 때문이다.

네가 나를 유혹하는 바람에 내가 이런 죄들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네가 나를 훈계한단 말인가?

너는 한 번도 구주의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또한 너를 시험한 자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네게 끊임없이 시험을 당했고 네 사악한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이 말을 들은 악귀는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너를 이곳에 떨어지도록 유혹한 것이 나의 소행이었음을 인정한다.

네게 복음을 전하던 자들도 다 그렇게들 말했었지 그들은 우리가 너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분명히 경고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는 사자들처럼 두루 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아 다녔다(벧전5:8)

나는 네가 다른 사람처럼 전도자들의 말을 믿고 돌아서서 우리에게 큰 실망을 안겨 줄 까봐 조마조마 했었다.

하지만 너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따라와 주었고 우리가 할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 주었으니 우리가 네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나 정당한 일이다.” 


악귀는 말을 마치자마자 그를 다시 고문하기 시작했는데 가련한 그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이 너무나 두려워서 더 이상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에페네투스는 천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멸망 당한 영혼들의 상황이 너무나 처참하군요. 그들은 땅에서는   마귀의 노예로 지냈는데 마귀는 그들이 지옥에 내려오니까

그 일을 가지고 윽박지르고 고문을 하는군요.”하고 말하자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마귀와 그 추종자들이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품고 있는 증오는 상상할 수 없이 크다.

왜냐하면 복되신 구주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 그들이 상실했던 행복을 다시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을 한 사람도 멸망시킬 수 없지만 그래도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모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끊임없이 유혹한다.

그것이 인간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길 인줄을 알고 또한 많은 영혼들이 자신들의 계교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이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이유로 마귀와 그 수하세력이 그들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너는 이미 보았고 또 앞으로도 더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을 만족시키려고 이 짓을 하고 있지만 자신들도 뜻하지 않게 전능자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며 마귀를 청종하여 짐짓 멸망을 택한 죄인들을 전능자께서 처벌하실 때 쓰시는 형 집행관 들이다

거짓 증인들에게 가해질 더 큰 형벌

  그곳을 떠나 조금 더 가자니 멸망 당한 많은 영혼들이 한 곳에 몰려 있었다.

고문하는 악귀들이 지옥의 분노로 용암과 유황을 끊임없이 그들에게 퍼붓는 동안

그들은 극심한 분노와 고통을 못 이겨 이를 갈고 있었다.

간간이 하나님과 자기들 자신과 자기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를 퍼부어댔는데 듣기 두렵고 민망할 정도로 참람했다.

에페네투스는 참다못해 악귀에게 다가가 저 사람들이 과연 누구이기에

이리도 잔인하게 고통을 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마귀는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이런 벌을 받을 만한 자들이다.

다른 사람에게 천국에 이르는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듯 행세했으나 정작 자신들은

지옥을 너무나 사랑한 탓에 이곳에 온 저주받은 자들이다.

땅에서 지옥의 중요한 대리자 역할을 했으므로 지옥에서 특별한 대접을 해주는 게 마땅하지. 우리는 영혼들에게 벌을 가할 때 각자 받아야 할 몫을 넘기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안심하고 제한 없이 고통을 가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가르침과 행실로

 그릇된 길로 인도한 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자 에페네투스가 이렇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이 지옥을 위해 크게 수고한 사람들이라면 그 공로를 보아서라도 좀 더 친절하게 대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아귀는 이들이 악귀에게 인정받으려 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공로란 덕인데 우리는 모두 덕을 혐오한다. 덕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그 외에도 우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증오 하며 만약 우리에게 그럴 만한 권세가 있다면 그 중 하나라도 잘 되지 못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본업이란 아첨하고 속이는 것이니까.

그들을 놓칠 일이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말을 믿은 게 미련한 짓이었음을 깨우쳐 준다.”


구속의 큰 은혜

  몇몇 악귀와 더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에 아련하게 밀려오는 깨달음이 있었다.

천국 가는 길에 영혼들의 원수가 이렇게 많은 올 무와 덫을 도처에 깔아 놓은 것을 생각할 때 가련한 죄인들이 그것들을 헤치고서 천국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고  ‘장래 노하심’(살 전1: 10)에서 건지시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합당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 속에는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미련하고 정신 나간 요소가 있어서 은혜의 제의를 뿌리치고 파멸 자(the Destroyer) 조 한편이 되게 한다.

안내하던 천사가 말했다. “사람들 속에 있는 죄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눈을 멀게 하여서 상황을 올바로 판단하지 못하게 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에 안약을 발라주시고 무지와 오류의 비늘을 떼어주셔야만 참된 광명을 볼 수 있다.”(9: 1-18)

그곳을 떠나 좀 더 가다가 애를 끊는 듯한 비참한 원망을 듣게 되었다.

자기를 배신하여 이곳에 떨어지게 한 자들을 향해 내뱉는 원망이었다.  


구원받기에 너무 늦음

  멸망 당한 영혼이 외쳤다. “내가 평소에 믿고 의지하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말대로만 하면 어긋남이 없을 줄로만 알았어요.

그들은 죽기 전에 주여 저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말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오.

그런데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가 이 영원한 슬픔에 떨어지고 만 것이오!

임종 침상에서 나는 긍휼히 여겨달라고 말했지만 때가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임종을 앞두고 조금 정신이 들었을 때 악귀가 나더러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놓고 나중에 가서는 이제 너무 늦었으니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하며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오.” 라고 하자 악귀가 말했다. “너도 알듯이 나는 마지막에 가서는 네게 진실을 말해 주었으나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정하게 잘된 게 아닌가?

너는 죄가 좋아 인생을 허비하면서 더러운 일에 탐닉해놓고서 막상 죽을 때가 되자 천국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신 나간 자 말고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느냐 죽을 때 천국에 가기를 진심으로 원하려면 살아 있는 동안 거룩한 생활을 해야 마땅하다 너는 죽기 전에 주여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라고만 하면 된다고 네 난잡한 친구들한테 들었다고 말했지.

그것을 구실이라고 대는 거냐?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펼쳐서 이것(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12: 14)는 말씀을 읽었더라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너는 능력 닿는 데까지 죄 즐기려는 태도로 인생을 살았다.

죽음을 앞두고서 죄를 버린 것은 죄가 싫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죄를 따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도 이것이 사실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스럽게도 죄를 사모하는 마음을 품은 채 천국에 가려고 했단 말인가? 그런 일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너는 세상에서 경고를 들을 만큼 들었으므로 스스로 속지 말았어야 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 7)는 원칙이 분명히 천명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원망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원망하려면 너무 늦게 깨달은 네 어리석음에 대해서나 원망하라.”라고 악귀가 말하자

에페네투가 말했다. “마귀의 이 강론은 저 고통 받는 가련한 영혼에게 매우 통렬한 내용이군요. 지옥에 와 있는 자들뿐 아니라 지금 땅에 사는 많은 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뼈아픈 내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망적인 이곳에서 그 말을 듣는 것과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듣는 것이 너무나 큰 차이를 내는군요.”라고 말하자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는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관심이 허다한 인간을 파멸에 떨어뜨리는 것이지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다가 너무 늦어서 손 쓸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그곳을 떠나 조금 더 가자니 어떤 사람이 복된 영혼들이 누리고 있을 복락을 상상하면서 자학해가며 고통을 더 가중 시키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나는 이렇게 추한 몰골로 전락했는데 천국에 올라간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얼마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까!

나도 그들처럼 영광스럽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나도 그들과 똑같은 본성과 이성과 지적 기능과 역량이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 혐오스러운 괴물이 되어 영원히 숭엄하신 분을 끝없이 미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구나. 이젠 죄와 죽음이 내게 할 일을 완수했다

우리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게 된 것인가?

그들은 지극히 숭고하고 완전한 인간 본성을 입고 있구나.

우리의 차이란 쾌활하고 천 년의 기백이 넘치고 아름다워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과 썩어 문드러져 악취가 진동하는 시체의 차이보다 더 크다.

내가 고집을 피우며 끝까지 죄를 버리지 않다가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다.

나를 멸망시킨 것은 다름 아닌 죄가 나를 이 무서운 영원한 불의 응징을 받게 하여 죄값을 치르게 하는구나.”  


2
장 지옥에서 무신론자 홉스를 만나다.

고문하는 악귀

  멸망 당한 가련한 영혼이 쏟아내는 통렬한 자학의 탄식을 들은 우리는 조금 더 가다가 허다한 악귀들이 빨갛게 달궈진 강철 회초리로 불쌍한 영혼들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광경을 보았다영혼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소름 끼치도록 통절했다.

아무리 돌처럼 단단하고 짐승처럼 잔인한 마음이라도 녹일 것만 같은 애처로운 비명이었다. 참다 못한 에페네투스가 고문을 가하는 자들 중 하나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 그만두라

이들은 너와 같은 동료 피조물들이고 아마도 네 꼬임에 속아 이 비참한 지경에 온 영혼들 인데 이다지도 잔인하게 고통을 가한다 말인가?”하고 말하자악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물론 우리도 악한 존재들이지만 악귀들 가운데서 이들만큼 악한 자가 없고 이들만큼 심한 죄악을 범한 자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미워할지언정 하나님이 계신 줄은 다들 아는데 이들은 이곳에 올 때까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누구도 설득할 수 없던 완고한 자들이다.”

그러자 에페네투스는 그렇다면 이들은 인간들 가운데 가장 가증스러운 무신론자들이군.

영원한 은혜가 나를 붙들어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이들의 말을 듣고 영원히 멸망 당할 뻔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고문을 당하던 불쌍한 영혼 하나가 갑자기 애처로운 소리로 외쳤다.  


세상에서 무신론자였던 영혼과 나눈 대화

 저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나는 안다. 자네는 에페네투스가 아닌가?”

지옥에 온 영혼이 내 이름을 말하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구인지 너무나 궁금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맞소 내가 에페네투스요. 그런데 이 비참한 멸망의 장소에서 나를 알아보는 당신은 누구요?” 하자

그 멸망 당한 영혼이 대답했다. “나는 세상에서 한때 자네를 잘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 자네를 설득하여 거의 나와 같은 견해를 갖게 할 뻔 했었지.

내가 저 유명한 [리바이이던](Leviathan)이라는 저서를 쓴 저자라네.”라고 하자 에페네투스는 뭐라고?  

그 유명한 홉스(Thomas Hobbes,1588-1679년 영국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역자주) 라고?

자네가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음성이 너무나 달라져서 알아보지 못했다네

그러자 홉스가 말했다. , 내가 바로 그 불쌍한 사람이라네.

하지만 이젠 명성과는 거리가 멀고 이 고통스러운 곳에 와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축에 속할 뿐이지. 음성이 변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야 세상에서 주장하던 원칙들이 이곳에 와서 모두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라네.

물론 바뀌어봐야 무슨 선한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안다 한들 내게 긍휼을 베푸시는 일도 없을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할 의무도 없으시니 차라리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겠어.

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자처하고 살았는데 이제 지옥에 와서 전능자가 힘을 다해 가하는 고통, 피조물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을 겪고 있네.

세상에서 그렇게 악담을 퍼부어가며 조소하던 내 영원한 원수의 힘을 꼼짝없이 사로잡힌 느낌이라네.  내 얄팍한 지식에 대한 자만심이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네.”라고 하자 에페네투스가 말했다.

 “자네의 처지가 참 딱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응당 받아야 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일세.

자네가 세상에서 얼마나 부지런을 떨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돌려놓고 그들로 지옥의 멸망에 동참하게 했던가?

나도 그 올 무에 걸려 돌이킬 수 없이 멸망할 뻔했기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지.” 

그러자 홉스가 말했다.  “내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멸망에 떨어지게 했는지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아프다네.

처음 자네의 음성을 들었을 때 혹시 자네도 형벌을 받으러 이곳에 온 줄로 알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지.  내가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랄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닐세.

내가 이 지경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꼴을 어찌 보아주겠는가?

내가 마음이 아프다고 한 이유는 땅에서 살 때 내 유혹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 하나하나가 나를 곱절이나 더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야.”라고 말하자 에페네투스가 말했다. “하지만 꼭 알고 싶은 게 있으니 대답해주게나.

자네가 땅에서 살 때 정말로 하나님께서 안 계시다고 믿었는가?

정말로 세계가 저절로 지어졌고 피조물들이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은 것인가?

혹시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나를 지은 게 아니라 다른 분이 나를 지으셨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는 않았었는가? (100: 3)

이 문제에 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단 말인가?

나는 땅에 있을 때 겉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호언 장담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네.   만약 겉으로뿐 아니라 속으로도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상한 일일 것일세.

왜냐하면 하나님을 부인하더라도 마음에 그분이 존재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란 없기 때문이지.

이제는 자네가 어느 쪽인지 말할 수 있겠지 여기까지 와서 속 마음을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라고 하자 홉스는 이렇게 말했다. “에페네투스 그 생각이 새롭게 마음을 찌르는 것이 사실이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겠네.

처음에는 나도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믿었다네! 하나님이 주권자이자 자충족적인 권세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하지만 후에 악한 생활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을 때 그런 하나님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슬그머니 생기더군.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 한 일이야.

따라서 하나님이 의롭고 정당하셔서 율법을 범한 자들을 처벌하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나는 내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았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분을 미워하고 차라리 계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세.  

그러나 그 뒤로도 계속 해서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는 생활을 했는데도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을 의식하고는 하나님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 것이지.

이런 희망을 토대로 내 희망에 부합한 개념들을 수립하기 시작했다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 채 세상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체계를 수립하고 나니 그 개념이 너무나 마음에 든 나머지 마침내 그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 것일세. 그 후부터 그 사상 체계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주려고 노력했지.

하지만 그러다가 유명인사가 되고 난 뒤부터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자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곤 했다네.  그때부터 줄곧 마치 내가 마지막에는 큰 낭패를 보게 될 것만 같은 낯설고 불편한 생각에 시달리곤 했지만 마음을 다잡고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곤 했지.

나를 멸망의 길에서 돌이키게 했을 수도 있는 그런 가책들이 이곳에서 나를 가장 괴롭고 아프게 만들고 있다네. 이제 와서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죄를 사랑하다 보니 나를 지으신 분에게 마음이 완고해졌는데 처음에는 그분을 미워하다가 나중에는 그분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일세.

마음에 밀착시키고 살았던 죄가 내게 이런 저주를 안겨준 원흉이었던 셈이지.

사탄이 내 영혼에 달라붙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거야.

땅에서는 내 비록 헛된 철학에 몰두하고 내 스스로 고안한 새로운 사상 체계를 세상에 보급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분이 크고 두려우신’(1: 5) 분임을 깨닫게 되었다네. 또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이 결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야(6: 7)

세상에 살 때에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엇이든 거룩한 것이면 업신여겼으며 그 방식으로 내 저주받을 사상을 세상에 널리 퍼트렸지. 그리고 그 방식이 언제나 성공을 거두었어.

거룩한 말씀을 조소하고 무너뜨리는 데 이용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나 우호적으로 대하여 내 제자로 삼았기 때문이었겠지.

그러나 이제는 그 사상 자체가 뜨겁게 달궈진 강철 채찍으로 얻어맞는 고통보다 나를 더 괴롭힌다네. 하늘의 엄 위로 우신 하나님에게는 당신이 친히 내신 귀한 것을 업신여기는 것보다 더 진노를 일으키는 것이 없기 때문일세.”하고 말하자 에페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말을 듣고 나니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의 의로운 뜻과 법을 어기는 것이야말로 죄 중에서도 가장 중한 죄임을 쉽게 알겠군.

그리고 자네가 이와 같은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것도 다 죄에 탐닉했기 때문인 것도 잘 알게 되었어.

자네가 당연히 받아야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퍽 잔인하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일이 되겠지.

하지만 자네를 더욱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하려는 마음은 추 오도 없다네.

다만 해결하고 싶은 또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을 뿐이야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자네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달궈진 강철과 불과 화염 때문에 울부짖고 있다고 들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 여기에 불이 어디 있는가?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 빛도 발했을 텐데 내가 보기에는 자네가 완전한 칠 흙 속에 있는 것 같으니 말일세.”하고 말하자 홉스는 , 만약 불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할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얼마나 한결 수월해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가 견디고 있는 불은 화덕의 불보다 천 배는 더 뜨겁고 성질도 그것과 사뭇 다르지 세상에서 타오르는 불은 다 빛을 동원하지만 이곳의 불에는 빛이 없다네.

그래서 지옥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는데도 우리는 완전한 어둠에 갇혀 있는 거라네.

지상에서 타오르는 불은 물질을 소멸 시키는 성질을 갖고 있지 한번 불이 붙으면 재만 남게 되는 거야.  연료가 더 공급되지 않으면 불은 꺼지고 만다네.   한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아.

그 열기를 몸으로 느끼는 사람만이 아는 가공할 만한 기세로 항상 타오르지만 아무것도 사르지 않고 앞으로 영원히 그럴 것일세.   우리는 항상 불이 붙어 있지만 불에 타지는 않는다네.

고통은 주되 사르지는 않는 불인 것이지 지상에서 타오르는 불은 물리적인 불이어서 비물질적 실체들에는 붙을 수 없고 따라서 영혼들을 태우지 못하지.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이 우리 영혼들에 붙어서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극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네.

나는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땅에서 살 때 비물질적 실체들이 불에 탄다는 개념을 조롱했고 여기서 그 대가를 치름으로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고 있지.   이곳의 불과 지상의 불 사이에 다른 점 또 한 가지가 있어.

지상에서는 언제든 원할 때 불을 붙이고 끌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네.

이곳의 불은 유황이 강물 같은 하늘의 입김으로 붙어서 영원히 타오르지.

그러므로 이곳의 불을 꺼지지 않는 불’(3: 17)로 표현한 것은 대단히 적절한 것일세.

이불이 영원히 우리의 몫이 될 것 같군 이것이 자네가 내게 물은 마지막 슬픈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네.”

에페네투스는 전능하신 분께서 당신의 의로운 법을 범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처분하시는 것을 깨닫고 참으로 두려워하였다.

성질 급한 악귀가 나서서 이제 그만 가보라고 악을 쓸 때까지 나는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홉스 에게 들은 바를 확인 했다.

악귀는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세상에서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지 이젠 잘 알았는가? 저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하자 에페네투스는가 말했다.

물론 저 사람들이 당하고 있고 훗날 너 역시 당하게 될 고통은 죄에 대한 의로운 형벌이다.

너도 저 사람들처럼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에게 죄를 범 했으므로 너 역시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저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적이 없다고 말해보아야 아무런 핑계도 되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그분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주님 앞과 그 권세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공 의로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하자 악귀는 이렇게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가 장차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마귀의 시험을 받아 타락했다는 이유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면 나와 나머지 모든 하급 악귀들도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우리도 빛나는 루시퍼(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그의 편에 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루시퍼의 죄를 가중시킬지언정 하급 악귀들의 책임은 덜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이곳에 온 이후로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던 안내하던 천사가 분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분을 배반한 이 악 하고 거짓된 귀신아! 네가 그런 뻔뻔스러운 말을 하고서도 여기 있는 나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느냐 네가 교만한 마음 때문에 너를 영광스러운 피조물로 지으신 복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루시퍼 편에 붙었던 사실을 잊었느냐너는 네 아름다움을 자랑함으로써 복되신 창조주보다 위에 서고 싶어 했다.

전에는 단정하고 아름답던 모습이 지금과 같이 징그럽고 기괴하게 바뀌었다.

이것이 교만에 대한 정당한 벌이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악귀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여 이곳에 와서 우리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는가?”(8: 28-29)

악귀는 이 말을 마치고는 감히 그 자리에 남아 대답을 들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이 슬금슬금 도망을 쳤다. 악귀가 사라진 뒤 에페네투스는 안내 자에게 배교한 천사들의 타락에 관해서 들은 적이 있지만 그 주제에 관해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훗날 네 사멸 성을 벗고 천상의 복된 상태로 변화하고 나면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네 상태에서는 성경에 기록된 교훈 외에 더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냥 천사들이 죄를 범했고 죄 때문에 지옥으로 던져졌다는 것만 알면 족하다.

그러나 최초에 자기들을 지으신 영원히 순결 하신 분’(the Eternal purity)에 대해

어떻게 반기를 들 생각을 했는지 지금 너의 상태에서는 이해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피조물들이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즐겨 받으시는 분인데 전능 자에게는 천사들을 모두 그렇게 자유로운 사역 자들로 지으셨다.

성경이 가르치듯이 이렇게 드리는 예배를 가르쳐 영적 예배(12: 1)라고 한다.

아담이 낙원에서 그랬듯이 천사들도 하늘에서 시험을 치를 때가 있었다.

그들도 아담처럼 타락할 가능성을 지닌 채 창조 되었지만 아담의 타락이 복되신 메시아의 위대한 약속으로 회복 되었듯이 배교한 천사들이 빠져나가 커다란 공백이 생긴 상황에서도 자기들의 자리를 끝까지 지킨 모든 복된 천사들은 메시아의 놀라운 은혜에 힘입어 인정을 받았다.

메시아께서는 사람들뿐 아니라 천사들에 대해서도 영원히 머리가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 이시기 때문에 만물 위에 뛰어나시다(1: 18)

그러나 너는 이 고통과 저주의 캄캄한 영역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영원한 공의가 어떻게 두렵게 빛나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저주받은 악귀들과 영혼들조차 다 인정하는 바이다장차 최후에 심판 날이 와서 죽은 자들의 육체가 살아나 제 영혼들과 다시 결합한 뒤 심판대 앞에 나아갈 때는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영혼들 가운데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선고 하실 영원한 멸망에 대해 항변 할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라고 하자 에페네투스는 이렇게 말을 했다.  “그들이 한결 같이 죄책감에서 생기는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형벌의 공정성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이 음울한 감옥은 죄의 가장 적절한 빛깔로 바라 볼 수 있는 최고의 거울입니다.

죄에 심한 악의가 없다면 이토록 극형이 따르지 않겠지요.“하자 천사는 너의 추론은 매우 자연스럽지만 죄에 대한 공정한 보응을 살펴보기에 더 좋은 거울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일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거기서 죄의 두려운 결과를 살펴 볼 수 있다.   거기서 죄의 진정한 악의가 무엇인지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저주받은 자들이 마무리 극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것은 피조물로써 당하는 고통이지만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맛 보신 분은 하나님 이시다.” 하자 에페네투스는 옳습니다. 그 참혹했던 순간만큼 공의와 자비가 서로 훌륭한 조화를 이룬 사건이 없지요 (85: 10)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공 의로운 형벌이 충분히 치러졌고 십자가로써 가련한 죄인들을 위한 구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자비가 승리하고 만족을 얻은 것입니다.

크신 은혜로 저 같은 자에게 이 큰 구원을 기쁘게 받게 해주시고

그로써 영광의 후사가 되게 해주신 그 거룩하신 이름에 영원히 찬송을 드리나이다.

구원이 제시 되었을 때 그것을 어리석게도 거절했다고 괴로워하는 멸망 당한 영혼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구원을 뿌리치지 않고 받은 것은 순전히 은혜로 된 일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자 찬란한 천사는 이제 나를 다시 땅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내가 고대하던 복된 변화를 입게 되는 날까지 믿음과 인내로써 기다리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제든지 내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혼의 대 원수는 하나님의 마음에 관해서 대단한 발견과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을

교만에 빠지게 할 유혹 거리들을 잔뜩 보유한 채 오로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자들을 넘어뜨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절대로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

마귀는 번번히 실패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고 시험을 하며 종종 택함을 받은 자들을 속여 죄를 범하게 하고 그들로 그 죄로 인한 슬픔을 안고 무덤에 내려가게 한다고 일러 주었다. 나는 천사에게 소중한 조언을 해주셔서 고맙다고 사례한 뒤 만약 그것을 큰 선물로 받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한 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천사는 이제 절망과 고통에 찌든 거민 들이 거하는 이 저주와 공포의 영역을 떠나자고 했다.

지옥을 나서서 잠깐 사이에 나는 다시 지상에 와 있었다.

내가 도착한 지점은 이 책의 서두에 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없다고 나를 속여 온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자살이라는 끔찍한 죄를 범하려고 계획하던 그 장소였다

내가 어느 길로 다시 돌아 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전에 앉았던 강둑에 서자 줄 곳 나를 안내했던 천사가 이렇게 말했다.

에페네투스 이제 이곳 이 자리를 알았으니 너와 작별해야겠다. 내겐 가서 할 일이 있다.

하늘과 땅과 지옥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보좌에 앉으신 분께 영원히 찬송을 드리자.

이 짧은 시간에 네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기이한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라.”  

                                                                       
집으로 돌아가다

내가 대답하려고 하는 순간에 찬란한 나의 안내자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나만 홀로 남았다. 나는 그 자리 앉아 내가 본 엄청난 환상들과 내가 들은 놀라운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리니 내가 다시 땅에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작정하고는 먼저 무릎을 끊고 내게 보여주신 기이한 일들이 하나도 기억 속에서 흐려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사하고 찬송을 드렸고 그 기이한 은혜와 자비를 마음에 가득 담은 채 걷기 시작했다.  


겉으로 나타남 변화

  집에 도착하자 식구들이 너무나 이상하게 변한 내 모습에 크게 놀랐다.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느냐고 물었다.

식구들은 내 얼굴이 달라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어떤 점에서 다라졌느냐고 물었더니 어제만 해도 잔뜩 찌푸리고 가라앉아 절망에 빠진 것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얼굴이 예전과 비할 수 없이 아름다워졌고 기쁨과 만족의 표정이 가득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식구들에게 만약 오늘 내가 보고 온 것을 보았다면 내 모습이 변한 것에 놀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 다음 내 방에 들어가 펜과 잉크를 꺼낸 다음 내가 듣고 본 곳을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내가 이 글을 쓰며 느꼈던 감동과 감사를 느끼시기를 기원한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1: 17)  


존 번연의 생애(1628-1688) 

  존 번연은 1628년에 잉글랜드 베드포드에서 2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엘스토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 시대에서 다들 천하게 여기던 땜쟁이(솥과 냄비 때워주는 사람)였다.

그러나 이웃에는 좋은 평판을 얻었던 사람이었다. 번연은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악하고 무익한 생활에 탐닉하느라, 학창 시절에 배운 것마저 까먹어 가며 소중한 세월을 허비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다

  존 번연은 어린 나이에 신앙으로 교육받은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다.

그 아내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대화를 나누면서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되었고 술집과 술친구들 보다 가정과 아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내는 결혼할 때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는데 한 권은 보통사람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었고 다른 한 권은 경건훈련 이었다.   이 두 권의 책이 번 연의 신앙 성장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좌절의 시기

  그는 젊은 시절 죄를 많이 짓든 적게 짓든 멸망하는 것은 똑같다는 절망에 빠져 의도적으로라도 죄에 탐닉해야만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죄를 짓는 데까지 지어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으면 아까우므로 아직 지어보지 못한 죄를 찾아내어 그 단맛을 보고 싶었다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죽을 까봐 서둘러서 죄의 달콤한 것들로 배를 채웠다.


변화된 사람

  이 비참한 길에 있던 그에게 뜻밖의 방향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하루는 성깔 있는 여인이 너무 심한 욕(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하는 악담-역자주)을 한다는 이유로 번 연을 마구 나무랐다.

평생 살면서 당신처럼 심한 욕을 하는 자는 처음 보았다고 하면서 그에게 읍내의 젊은 사람들을 죄다 버려놓고도 남을 만한 자라고 몰아붙였다그 말에 번 연의 마음에 화살처럼 깊이 박혔고 그 순간부터 그는 욕하는 죄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성경을 다시 읽기로 다짐했다. 행동이 크게 달라 지자 이웃 사람들이 그를 개과천선한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말씀을 율법으로 두려움과 불안으로 지키다가 어느 날 신앙심이 깊은 몇몇 여성들이 거듭남에 관해서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어깨너머로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 관이 매우 부실하고 진정으로 경건한 삶이라는 증표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번 연은 성령의 긍휼히 여기심을 힘입어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성경을 확신(45: 17)을 얻게 되었고 죄의식으로 번민하던 영혼이 안식할 곳을 찾게 되었다.

 설교자가 되다.

  번 연이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 각처에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다.

사역이 눈에 띌 정도의 성공을 거두자 얼마 후에 번 연은 금식하면서 주님 앞에 기도 드린 뒤 베드포드 교회로부터 그 지역과 주변 지역을 담당하는 정규 순회 설교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다.  


옥에 갇힘

  존 번연은 성경대로 전하는 몇 가지 복음진리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 소책 때문에 퀘이커 교도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 책 머리에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분의 건실한 신앙과 경건한 대화.

그리고 인간의 재주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에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능력 많은 죄인들을 회심케 한일을 여러 성도들과 함께 지켜본 본인은 이 책이 본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하고서 내 형제와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하고 단순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증거 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 1657년 번 연은 이튼 에서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이후 몇 달 만에 번 연에 대한 영장이 발부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번 연은 설교를 그만두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판사의 요구에 거절하다가 베드포드 감옥에 수감되었다.

죄목은 노동자인 번 연이 흉악하고 사악하게도 영국 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불법 집회와 비밀 집회를 여러 번 공동으로 주관하여 왕국의 선량한 백성들에게 큰 불안과 혼란을 조장 함으로서 우리의 주군이신 국왕의 법을 어기는 죄를 범했다는 것이었다.

이시기에 첫 번째 아내와 사이에 네 자녀가 있었다. 맏딸 메리는 날 때부터 시각 장애자였다.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두 번째 아내가 해산할 날이 얼마 남지 않고서 남편이 구속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남편이 추방 될 것이라는 소식에 충격으로 사산을 하게 되었다. 숭고한 정신을 지닌 이 여성은 남편의 석방을 위해서 강인하게 투쟁했다.

트위스덴 판사가 존 번 연에게 설교를 그만 두게 하려고 설득하자.

그녀는 재판관님 제 남편은 말 할 수 있는 동안에는 설교를 중단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재판관은 욕설과 조롱을 퍼부으면서 평생 가난을 면치 못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악담을 해댔다.

그때 그녀는 이런 심경을 털어 놨다. “처음 법정에 들어섰을 때 조금 두렵고 떨렸는데 법정을 나서려 하니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나와 남편을 매정하게 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 가련한 자들이 주님 앞에서 과연 어떤 말을 하게 될지 생각하니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감생활

  번 연은 12년간 옥살이를 했으나 그 기간 동안 가끔 간수의 묵인 하에 밤의 어둠을 타 외출을 하곤 했다. 그는 오랜 옥살이를 하는 동안 불후의 역작인 천로역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많은 교훈과 위로를 안겨준 여러 책자를 집필했다.  
한번은 국왕 찰스2세가 오웬 에게 어떻게 지식인이 무식한 땜장이의 설교를

그렇게 앉아 꼬박 들을 수 있느냐고 묻자 위대한 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오웬이 전하 만약 제가 그 땜장이만한 설교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제가 가진 모든 학식을 기꺼이 버리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존 번 연은 갔으나 그의 저서는 살아남다

 존 번 연은 비를 흠뻑 맞고서 얻은 열병을 이기지 못한 채 1688 8 12일에 런던에서 숨을 거두고 런던의 교회 뜰인 번 힐필즈에 묻혔다.  그의 아내는 4년을 더 살다가 남편의 뒤를 따랐다.

 

                       문서정리 클라라……………………

출처 :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글쓴이 : 영심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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